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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른 쪽빛이 배어있는 광주

백제시대

백제시대 사진

시조 온조는 고구려의 시조 주몽과 졸본왕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서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에게서 낳은 유리가 와서 태자가 됨으로 그의 형 비류와 함께 오간마여 등 10여 명의 신하와 약간의 백성들을 이끌고 남하하였다.

그리하여 한수 북쪽 지금의 서울 부근인 위례부락 하북 위례에 자리잡고 형 비류는 미추홀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비류는 미추홀에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거주 할 수 없으므로 돌아와 위례를 보니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이 편안한지라 부끄럽고 후회하며 죽으니 그 신민이 모두 위례에 기부하였다.

그 후 온조왕은 국호를 십제에서 백제로 개칭하였다.

삼국의 하나로 한반도 서남쪽에 있었던 왕조가 백제

온조 13년에 하북 위례성에서 한수를 건너 지금의 몽촌토성 부근 평지에 궁궐을 짓고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하는 한편, 목책을 세워 도성의 모습을 갖추고서 하남위례성이라 이름하였다. 그 후 하남시 춘궁동 이성산 밑에 하남위례성으로 천도 하였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백제의 첫 도읍지인 위례성의 위치는 현재의 충남 청원군 직산 부근으로 보는 견해가 조선시대 중기까지만 하여도 거의 정설이 되다시피 하였다. 문헌상 위례성이 직산설을 가장 먼저 주장하고 있는 것은 삼국유사이다.
즉 삼국유사 1권 왕력에 기록된 백제 온조왕 즉위년조에는 ‘위례성에 도읍함이라고 되어 있음. 혹은 사천이라고도 함, 지금의 직산이라 하였으며 다시 동왕 변진년조에 도읍을 한산으로 옮겼는데 지금의 광주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위례성의 직산설이 아무런 근거없이 나왔다기보다는 실제로 직산지역이 백제시대 위례성으로 불리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그것은 백제가 고구려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기고 남천한 이후의 일로서 온조왕 14년의 천도지 즉 하남 위례성이 지금의 광주지역에는 그 뒤로 아무런 이론이 없지만 초도지인 위례성이 직산에 있었다는 삼국유사 이래의 주장의 실학자 정약용에 의하여 비로소 부정되고 서울, 광주 일대가 백제의 초도지였다는 주장이 정착하게 되어 오늘날은 대부분이 이에 의심을 품지 않는다.

백제는 원래 부여족으로서 부여족은 서기 286년에 모용씨에게 멸망된 후 그 일파가 남하하여 함경도 지방의 옥저로 들어가고 다른 일파는 다시 서남쪽으로 내려와서 마한의 하나인 백제국에 정착하여 마한을 정복 통일의 주도권을 잡은 것으로 보인다. 주도권이 확립된 것은 제13대 근초고왕 시대로 보인다. 백제의 사실상의 건국은 이때에 된 것이라고 보는 이도 있다.
근초고왕은 동진으로 사신을 보냈으며 마한의 나머지 땅을 합치고 북으로는 대방군의 땅을 점령하여 낙랑군을 차지하고 남하하는 고구려세력과 충돌하게 되었다.
서기 371년(근초고왕 26년)에 임금은 그의 아들 근구수로 하여금 고구려를 치게 하여 평양에 까지 쳐들어가서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케 하였다.그러나 곧 고구려의 반격을 받아 다소 후퇴하여 수곡성 신계에서 고구려와 상대 하였다. 당시 전진 고구려 신라의 삼국연맹에 대항하여 백제는 중국 남조의 동진 및 신라와 자주 싸우던 일본과 손을 잡으면서 이에 대항하고 있었다. 이때 일본과의 관계는 더욱 긴밀하여 아직기, 왕인 등을 일본에 보내어 한학을 가르쳤다.

그러나 서기 396년 아신왕 5년에 고구려 광개토왕의 군대에게 대패하여 임진강 유역을 잃었고 서기 399년에는 신라 및 가야에 침입했던 일본군도 고구려군에게 소탕되어 백제의 위치는 매우 불리하게 되었다.
더구나 제 21대 개로왕 재위 때에는 고구려 장수왕의 압력이 한층 더 심해져서 백제는 중국의 북위와 교류하여 고구려의 남진하는 세력을 견제하려 하였으나 실패 하였다.
서기 475년 문주왕 1년에는 백제의 서울인 남한산성이 고구려의 공격으로 함락되고 개로왕마저 사로 잡혀 죽고 말았다. 그리하여 문주왕은 곧 서울을 웅진(웅진, 공주)으로 옮겼으며 여기서 삼근왕 동성왕 무녕왕 성왕의 오대의 치세가 열렸다. 서기 538년(성왕 16년) 다시 부여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 하였으니 공주시대는 겨우63년에 지나지 않았다.

위례성과 고골

백제 왕국은 백제 부족을 주체로 하여 형성된 고대국가로 북방에서 이동한 부족세력을 기반으로 하여 남하 과정에서 토착세력을 흡수 부속시키면서 성장한 유민집단이다.

백제 초기의 도읍지에 대한 고대 역사책을 살펴보면, [삼국사기]에는 온조와 비류가 한산에 이르러 부아산에 올라가서 도읍터를 물색하다가 비류는 해변에 살기를 원하니 신하 열 사람이 아뢰되 [이하남의 땅이 북쪽에는 큰 강이 있고 동에는 높은 산이 있으며 남에는 기름진 땅, 서에는 큰 바다가 막혔으므로 여기에 나라를 세우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여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하고 비류는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지금의 인천문학산)로 갔다고 한다.

[백제 본기]에는 온조왕 13년에 왕이 신하에게 말하기를 [동에는 낙랑이 있고 북에는 말갈족이 있어 우리나라를 침범하니 편안한 날이 없고 요성(악한 별이라는 뜻)이 여러 차례 보이므로 도읍을 옮겨야 했다. 어제 나가보니 한강 남쪽 지방이 토지가 비옥하므로 그곳으로 옮기겠다]하고 한산 아래에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에서 백성을 옮기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온조왕 14년 한산하로 도읍을 옮겼다고 한다.

[백제사]에는 근초고왕 26년 한산으로 도읍을 옮겼다 하였고 문주왕 원년에 웅진으로 옮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맨 처음이 위례성, 다음이 한산아래, 다음이 한산 그리고 웅진이다.

위례성

온조가 한산에 이르러 부아산에 올라가서 도읍터를 관찰했다는 한산과 부아산의 정체를 알아야 할 것이다.
한산은 고을 이름도 한산이 있고 산 이름도 한산이다. 백제가 웅진으로 고구려에게 밀려난 후 고구려가 이곳을 한산군이라 칭했고 그 후 신라가 점령한 후에도 한산주라 일컬었다. 또 산 이름에는 남한산, 북한산이 있다.
온조가 한산에 이르러 부아산에 올라갔다는 것을 보면 부아산은 한산의 산맥이거나 근처에 있는 산임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런데 북한산의 주된 봉우리인 삼각산의 다른 이름이 부아산이다. 그러므로 그때 온조가 올라갔다는 한산은 북한산으로 추정해야 하며 신하가 말하기를 북에는 큰 강이 있고 동해는 높은 산, 남에는 기름진 들, 서에는 큰 바다가 막혔다는 하남의 땅이 어느 곳이냐 하는 것이다.

[신단 실기]에는 광주 이성산을 위례성이라 하였다. 이성산은 하남시 초일동에 있다. 산허리에 돌로써 성을 쌓은 흔적이 남아 있고 주춧돌과 기왓장이 쌓여 있으며 옛 그릇의 파편이 땅속에서 발견되는 것을 보면 옛날에 이곳에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전설에 의하면 백제왕자 두 사람이 이 산에 거주하였다 한다.

백제 왕자 두 사람은 비류와 온조를 가리키는 것 같고 여기에는 온조만 남고 비류는 미추홀로 간 것으로 보아 아성산이라 한 것 같다. 즉 기록을 보면 비류가 미추홀로부터 위례성에 와서 성이 견고함을 보고 병들어 죽은 후에 부하들이 미추홀에 돌아왔다고 하니 그때 위례성에는 온조, 비류의 부하들이 함께 거주했고 후세에 온조와 비류 다같이 백제 건국계통인물이므로 이성산이라 한 것이 아닌가 한다.
위례성산이 점차 와전되어 후에 이성산이 되고 지금은 한강남방의 서광주 평야에 속해있어 위례성이 있던 곳으로 추측된다.

이성산

이성산은 옛 광주시 서부면 초일리에 있으니 삼복에 돌로써 성을 둘러쌓은 흔적이 역력히 남아있고 주춧돌과 깨어진 기와장이 쌓여있고 무수한 옛 그릇의 파편이 땅 속에서 발견되고 있으니 옛날의 건물이 이곳에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가 있다.
전설에 백제왕자 두 사람이 이산에 거주하였다하여 이성산이라 한다하나 분명한 증거가 없고 추측에는 백제왕자 두 사람이 아니라 비류와 온조 두 사람을 가리킨 것이 아닌가 한다. 위례성에는 온조만 있고 비류는 미추홀로 갔었다.
그러나 고사에 비류가 미추홀로부터 위례성에 와서 성지의 견고함을 보고 부끄러워 병들어 죽은 후에 미추홀에 있던 비류의 부하가 모두 위례성에 돌아왔다는 기록을 보면 그때 위례성에는 온조, 비류의 부하들이 함께 거주한 것이 분명하고 또 온조와 비류는 백제의 왕자는 아니나 다같이 백제건국 계통의 인물이므로 후세에 백제의 왕자 두 사람이라 전하게 되고 그래서 이성산이라 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성산이라 부르게 된 것은 옛날에 위례성이 있던 산이라 하여 위례성산이라 부르던 것이 점차 와전되어 후세에 이성산이라 부르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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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수정일
2020-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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