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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른 쪽빛이 배어있는 광주

원사골 김사녀(金士女)

원사골 김사녀(金士女)

광주시 경안동에서 3번 국도를 따라 곤지암리를 1km가량정도 지나다 보면 이천, 양평으로 향하는 3거리에 이르고 양평방면으로 329번 지방도를 타고 더 들어가면 도로 안쪽에 80여 가구가 모여 사는 상오향리에 도착하게 된다. 상오향리 북쪽산록을 따라 2∼3가구가 흩어져 있는 속칭 원사골(또는 원수골)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예로부터 정절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김사녀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옛날 이 고을에 김사(金士)라는 점쟁이가 살고 있었는데 그에게는 무척 영리하고 용모가 단정한 사녀(士女)라는 딸이 있었다.

아비는 생활이 너무 궁핍해 딸의 나이 10세에 한마을에 사는 정도령에게 시집을 보냈다. 시집간 지 몇 년이 지나자 남편은 입신양명의 꿈을 안고 외지로 떠났다. 사녀는 남편이 떠난 뒤 곧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입신양명해 돌아온다던 남편은 공부는 하지 않고 노름과 주색에 눈을 돌려 빚더미에 앉게 됐다.

그러나 김사녀는 남편이 진 빚을 갚느라 동네 李부자의 신세를 지게 됐는데 이것이 화근이 됐다 李부자는 빌려간 돈을 빌미로 은근히 압력을 가하면서 추근거리기 시작했다. 어느 해 삭풍이 매섭게 몰아치는 겨울에 김사녀는 나무를 하러 산으로 갔다. 나무를 하던 중 눈 위에 웬 사람이 쓰러져 있지 않은가... 김사녀는 깜짝 놀라 뒷걸음질치다가 돌아와 우선 사람을 살려야 되겠다는 생각에 웃옷을 벗어 덮어 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얼마 떨어지지 않은 폐사로 사력을 다해 선비를 끌어다 놓고 나뭇짐 모두를 팽개쳐 버린 채 황급히 마을로 내려가 시어머니 앞에 엎드려 울며 사죄했다. 시어머니는 누구보다도 며느리의 정숙함을 알고 있는지라 조금도 책망하지 않고 위험에 처한 선비를 구하라고 등을 떠밀었다.

그녀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선비는 건강이 회복됐고 천만번 죽음으로 은혜를 갚겠다고 수차례감사의 표시를 하며 길을 떠났다. 물론 시어머니는 선비에게 아들을 혹 만나거든 부디 잘 타일러 집으로 되돌려 보낼 것을 부탁하기를 잊지 않았다.

이런 일이 있은 뒤 마을에서는 좋지 못한 풍문이 돌았다. 김사녀를 노리던 李 부자가 선비와의 불륜이 있다는 거짓소문을 퍼뜨린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김사녀가 꿈에서도 그리던 남편이 마을에 도착해 주막에서 술 한 잔을 들고 있는데 李부자가 나타나 「자네의 처가 시모에 대한 괄시가 심할 뿐 아니라 어떤 남정네를 넘봐서 집안이 엉망이 됐네」하고 모략했다. 남편은 분통이 터져 노모께 인사할 겨를도 없이 자신의 아내를 족치고 다시 기약없이 집을 나가 버렸다.

얼마 후 시모는 병환으로 세상을 떠나고 김사녀는 절망감을 느끼며 원사골의 깊은 연못을 향해 뛰어들어 한 많은 인생을 마쳤다. 몇 해가 지났다. 김사녀의 아들이 소년이 되어 도둑이 된 제 아비를 구하러 관가에 가고 이를 기특하게 여긴 고을 수령의 은의로 풀려난 남편은 고향마을로 돌아와 그 동안의 일들을 듣고 자신의 잘못을 크게 뉘우쳤다.

남편은 초라하게 묻혀있는 아내의 묘를 이장하기 위해 삽과 괭이를 들고 묘를 파헤쳤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벌써 죽은 지 10여년이 되어 가는 김사녀의 시신은 아직도 썩지 않고 있었다. 한 맺힌 죽음이 극에 달해 아직도 썩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정서방 부자는 김사녀의 시신을 장중히 장사지냈다. 장사를 지낸 날 밤이었다.

정서방의 꿈속에 김사녀가 나타나 「소첩은 서방님을 만나지 못한 깊은 한으로 구천을 떠돌다 이제 서방님의 정을 받으니 고이 눈을 감을 수 있습니다.」라며 사라져 버렸다. 그 후 정서방은 착하게 살아갔다.

이로부터 김사녀가 원통히 죽은 곳이라 하여 이 마을을 寃死골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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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관광과 | 김태순 | 031-760-4821
최종 수정일
2020-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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