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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학사 숨어살던 칠사

칠학사 숨어살던 칠사

고려왕조를 무너뜨린 이성계는 새로 나라를 세우고 왕위에 올랐으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썩어빠진 고려왕조의 악정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구제하고 정치를 바르게 베풀면 천하가 자기를 따르리라 생각했는데 그렇지만 않은 것이었다.

웬일인지 어리석고 무능한 옛 임금을 그리워 할뿐 자기를 따르는 자가 별로 없었다. 특히 고려 왕조의 신하로 있던 사람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행방을 감추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사람들 중에 한림학자로 있던 일곱 사람이 지금의 경기도 광주시에 있는 어느 산 속에 숨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산 정상에 올라가 멀리 북쪽 송도를 바라보며 통곡을 하면서 나날을 보냈다. 이 소식 을 들은 이성계는 신하들을 보내어 그들을 입조 하도록 청했으나, 그들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 응하려하지 않았다.

「상감께서 부르시오. 어서 개경으로 가시기 바라오.」 「황공하신 말씀이오나 따를 수 없다고 전하시오」 「여러분들에게 큰 벼슬을 내리신다 하오니 받아들이셔야만 후환이 없을 듯 합니다.」 「아무리 말씀하셔도 그 뜻을 받아들일 수 없소이다.」 「그것은 어쩐 까닭이오? 벼슬이 부족해서 그러시오?」 「나라를 잃은 우리들인데 들어갈 수 있는 벼슬자리가 어디 있단 말이오?」 「대감이나 어서 가서 오래오래 복록을 누리시오」 「그러지 마시고 상감께서 간곡히 여러분을 청하실 때 못이기는 척 하시고 들어가십시다. 여러분이 끝끝내 고집을 부리시면 그 화가 크게 미칠 것입니다.」 「그런 말씀을 하시려거든 차라리 우리들을 이 자리에서 대감의 손으로 죽이는 것이 좋지 않겠소이까, 그리되면 대감은 돌아가서 후히 상을 받으실 것이오.」 「그게 무슨 말씀이오. 나는 다만 상감의 명을 받고 왔을 따름이오. 상감께서 여러분을 죽이라 고 명을 내리시진 않았지만 나는 여러분을 위해서 그런 말을 했을 뿐이오.」 「옛날부터 여자는 지아비를 잃으면 죽을 때까지 정조를 지키는 것이어늘 하물며 신하된 자로서 나라와 임금을 잃고도 죽지 못한 몸이 어찌 두 임금을 섬긴단 말이오. 차라리 죽는 이만 못한 일이오.」 한 마디씩 말을 하는 학사들의 각오는 요지부동이었다.

이리하여 고려 신들은 설득시키지 못하고 그대로 발길을 돌린 형조판서는 불쾌하고 괘씸한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자기를 은근히 비꼬면서 고고한 체 또는 그들을 당장 죽이고도 싶었으나, 그대로 꾹 참고 돌아섰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개경으로 돌아오자마자 방원(芳 遠)을 찾아갔다. 방원은 아버지 이성계(李成桂)를 도와서 고려왕좌를 뒤집어엎는데 큰 공을 세웠으므로 세도가 자못 당당했다.

「무사히 다녀왔습니다. 하온데 일곱 명의 한림학자들은 자기들이 숨어있는 곳을 자칭 칠학사 (七學士)의 산이라 하옵고 각처에 사람을 보내어서 내통을 하여 역적모의를 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들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후환이 두렵습니다.」 「무엇이? 그렇다면 그냥 놔 둘 수 없는 일이로다.」 형조판서의 모함에 방원은 대노하여 곧 군사를 풀었다. 형조판서는 대궐에 들어가서 방원에게 한 말과 똑같은 말을 이 태조에게 고하고, 군사를 풀었다는 말을 하였다.

그러자 이성계는 깜짝 놀라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곧 군사를 거두어라! 안 오겠다면 그만 둘 일이지 누가 잡아들이라고 했느냐? 그렇지 않아도 고려의 유신들을 많이 죽였다고 해서 민심이 날로 시끄러워 가는데 그들을 왜 죽인단 말이오?」 「황공하옵니다. 상감마마, 그러나 그들은 역적모의를 하는 줄로 아옵니다.」 「무엇을 보고 그런 소리를 한단 말이야?」 「그들은 모두 늙은이들뿐이고 글만 아는 아무 힘도 없는 사람들인데 무얼 가지고 역적모의를 한단 말인가? 당치도 않은 소리로다!」 일언지하에 이성계는 형조판서의 모함을 묵살해 버렸다.

그러나 방원은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부왕의 명으로 군사를 돌아오게는 하였으나 기회가 있는대로 그들을 잡아 죽이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염탐꾼을 보내어 학사들의 일거일동을 감시케 하였다.

이러한 기미를 알아차린 고려 수절신(守節臣)일곱 사람은 더 이상 그것에 머무르지 않고 송도 동쪽에 있는 광덕산 (光德山)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갔다.

두문동으로 들어간 지 얼마 안되어 그들은 몸에 불을 질러 죽음으로써 숭고한 절개를 지키었다. 그 후 조선조 숙종 때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칠산사에 와서 학사제(學士祭)를 지내고 글을 지어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였다.

그리고 일곱 명의 한림학사들이 숨어살던 그 산을 그들이 지칭한대로 칠사산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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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관광과 | 김태순 | 031-760-4821
최종 수정일
2020-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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