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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른 쪽빛이 배어있는 광주

남한산성

온조 왕도설과 주장성 축조

백제의 도성은 시기에 따라 한성에서 웅진성, 사비성으로 옮겨졌다. 그중 한성은 BC 18년 온조왕이 위례성에 도읍지를 정한 이래 문주왕이 웅진(공주)으로 천도하는 475년까지 약 500년 동안 백제의 도성이었다.

한성백제라고 부르는 이 시기의 도성은 어디였을까? 오늘날의 학자뿐만 아니라 유형원, 안정복, 정약용 등 조선시대 학자들에게도 매우 흥미로운 주제였다. 이에 대해 임진강 유역, 삼각산 동록, 장안평 일대, 하남시 춘궁동, 풍납토성, 몽촌토성, 남한산성 등 다양한 지역이 제시되어 왔는데, 이 중 남한산성이라는 견해는 고려시대에 처음 제기된 이래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현재 학계에서 남한산성을 백제 온조왕이 세운 도성으로 보는 견해는 소수이다. 1980년대 이후 이성산성, 하남시 춘궁동 일대, 몽촌토성, 풍납토성, 남한산성에 대한 전면적인 지표 및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그 결과 남한산성 일대에서 백제시대 주거지가 발견되었으나, 출토된 유물이 풍납토성이나 몽촌토성에 비해 양적으로 소량이고, 질적으로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소박하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한산성은 언제 처음 만들어졌을까? 「삼국사기」에 따르면, 지금으로부터 1,300여 년 전인 672년(신라 문무왕 12), 신라는 둘레가 8㎞에 달하는 거대한 성을 쌓았다. 당시 주장성(晝長城)으로 불렸는데, 현재 학계에서는 이 성을 남한산성으로 보고 있다.

주장성을 남한산성으로 보는 주된 근거로는 「세종실록지리지」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조선시대 지지자료에서 남한산성을 주장성으로 기록하고 있는 점, 2000년 이후 실시된 남한산성 성벽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신라시대 축성 기법으로 쌓은 성벽과 곳곳에서 통일신라시대 토기편이 확인되었고, 2004년에 남한산성 행궁지에서 통일신라시대의 대형 건물지가 발견된 점 등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주장성의 축성 시점인 672년은 신라가 이미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 해당한다. 그리고 둘레 8㎞에 달하는 거대한 성을 쌓기 위해서는 연인원 300만 명 이상이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신라가 많은 비용과 인력을 필요로 하는 대규모 토목공사를 감행한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당과의 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은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대동강 이남지역의 땅을 신라에게 주기로 한 약속을 어기고 백제와 고구려의 옛 땅을 직접 지배하고자 했다. 심지어 신라까지도 그들의 영토로 편입하려는 야욕을 드러냈다. 이에 신라는 당과 국운을 건 전쟁을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주장성을 쌓았던 것이다.

주장성은 수십 만명이 에워싸고 공격하더라도 쉽게 함락시킬 수 없는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하였다. 672년 한강유역에 주장성이라는 난공불락의 요새를 확보한 후, 신라는 당나라에 대한 공세를 더욱 강화하여 결국 676년 나당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남한산성의 축성과 개축

남한산성은 역사적으로 매 시기마다 중요한 군사전략적 요충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왔다. 조선시대에 대대적인 수축이 이루어지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어갔다.

조선시대 남한산성의 수축 문제는 태종대부터 그 논의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조선 전기에 수리나 수축이 이루어졌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논의로만 그쳤던 남한산성의 수축 문제는 임진왜란 이후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천험의 요새이면서 한양에 인접해 있고, 한양에서 남쪽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어 단순히 여러 주요 산성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유사시 왕실과 수도를 지켜줄 곳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인식에서 선조대에 와서 본격적으로 수축문제가 논의되었다. 하지만 수축에 막대한 노동력과 비용 등이 소용될 것으로 예상되어 더 이상 진척되지 못했다.

본격적인 수축은 인조대부터 이루어졌다. 반정으로 왕에 오른 인조는 외교정책을 친명배금정책으로 전환하였다. 이 외교정책의 전환은 후금(청)을 크게 자극하는 것이었고, 집권 초기에 군사문제에 크게 관심을 기울이는 계기가 되었다. 게다가 이괄의 난이 일어나면서 인조와 대신들은 공주로 피난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를 계기로 수도에서 가까운 남한산성의 수축이 중요한 현안으로 제기되어, 1624년부터 1626년까지 약 2년 4개월 동안 남한산성에 대한 대대적인 수축이 단행되었다.

이후 남한산성은 전란을 겪으면서 그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어 계속해서 원성뿐 아니라 외성의 증개축도 이루어졌다. 1638년 외성 남장대 옹성을 시작으로 1686년 봉암성, 1693년 한봉성, 1719년 신남성이 신축되었다. 이어 정조대인 1779년 다시 한번 대대적인 개축이 실시되었다. 한편 남한산성은 한양을 보호하고 비상시 임금이 피난하여 머물 수 있는 임시수도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행궁과 관아를 비롯한 여러 시설들이 함께 건립되었다. 특히 1625년에 시작하여 1626년에 완공된 것으로 알려진 행궁은 유사시를 대비한 일종의 예비궁궐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남한산성이 대대적으로 수축되자, 이를 보호하고 방어하기 위해 수어청(守禦廳)이 설치되었다. 한편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수도방위의 중대성이 증대되자 요충지인 광주지역은 유수부(留守府)로 승격했다. 그리하여 남한산성은 수어사와 광주유수에 의해 이원적으로 관리되었다. 이후에도 남한산성의 관리 체계는 몇 차례 변화를 겪었다.

병자호란과 광주

병자호란은 불과 2개월 여 만에 끝났지만, 전쟁이 남긴 정신적·물질적 피해와 후유증은 임진왜란 못지않게 심각했다. 인조가 무릎을 꿇은 치욕을 겪었을 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고, 수십 만명의 포로들이 청군에게 붙잡혀 심양으로 압송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당시 후금과 형제관계의 화약을 맺은 조선은 여전히 ‘오랑캐에게는 결코 칭신(稱臣)할 수 없다’는 대의명분을 앞세워 청과 맺은 기존의 관계를 파기했다. 하지만 청군의 침략을 막아낼 구체적 방안이나 대책을 마련하지는 못했다. 척화파와 주화파 모두 청과의 향후 관계를 놓고 논쟁을 벌였지만, ‘유사시 강화도로 들어간다’는 것 외에는 뚜렷한 대책을 제시하지 못했다. 이러한 사이 1636년 청군은 전격적으로 조선을 침략했다. 이때 직접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입한 청 태종은 인조를 붙잡아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 속전속결 전략을 구사했다. 상황이 다급해지자 조선 조정과 인조는 최명길이 홍제원에서 청군 장수들을 만나 시간을 끄는 사이 남한산성으로 급히 피신했다. 하지만 ‘천하의 요새’ 이었지만 확실히 ‘준비’되지 않았던 남한산성에서의 이후 농성 과정은 처참했다.

기대하던 원군과 근왕병이 청군에게 번번이 제압되었고, 일상적인 추위와 굶주림의 공포 앞에서 조선군의 저항 의지는 날로 약해졌다. 반면 남한산성을 압박하는 청군의 전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이 기간 동안 산성 주변에서는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졌다. 조선군은 몇몇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으나, 큰 규모의 전투에서는 대부분 참패하고 말았다. 1636년 12월 28일 남한산성 북문 골짜기에서 벌어진 대규모의 접전에서 조선군은 수백 명의 정예병을 잃었으며, 1637년 1월 3일 쌍령전투에서도 참패했다. 결국 조선은 청의 압박과 공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1월 30일 인조가 삼전도로 나아가 항복하고 말았다.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과 광주 주변의 백성들은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조정에 대한 접제(接濟) 때문에 시달렸던 것은 물론, 전쟁 자체로 인한 피해도 가장 혹심하게 입었다. 죽거나 다치고, 수많은 사람이 포로로 잡혀갔다. 호란이 끝난 뒤에도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거나 떠도는 참상을 겪었다. 이에 조정은 광주주민들에게 과거 응시의 기회를 주는 등 민심을 회유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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