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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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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소개

푸르른 쪽빛이 배어있는 광주

실학의 본고장

광주 출신의 실학자와 주요 사상

광주는 18세기 조선 실학을 일으킨 학자들의 고장이다. 안정복, 정약용 등이 광주지역을 대표할 만한 실학자였으며, 학계에서는 이들을 경세치용학파(經世致用學派) 또는 광주학파(廣州學派)라고 한다. 다음은 광주를 중심으로 활동한 실학자와 주요 사상이다.

안정복(安鼎福 : 1712~1791)의 본관은 광주(廣州)이며, 호는 순암(順菴)이다. 25세 때 가족을 따라 경안면 덕곡리(德谷里 : 중대동 텃골)로 거처를 옮겨 정착하여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곳에서 「치통도(治統圖)」·「도통도(道統圖)」 등을 저술하며 주자학 연구에 몰두했으며, 1746년에는 안산에 살던 이익(李瀷)의 문하생이 되어 경세치용의 학문을 배웠다. 그의 학문적 태도는 「하학지남(下學指南)」의 편찬에 잘 드러나는데, 현실적인 측면을 무시하고 형이상학을 추구하는 경향을 비판하면서 하학(下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저서로는 「동사강목(東史綱目)」이 있는데 역사적 관점에서 동국의 운영 사례를 검토하고, 이로부터 획득한 교훈을 현실의 문제 해결에 적극 대입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특히 토지제도에 관심을 기울여, 정전제(井田制)가 실제로 거행되었음을 증명하고 이를 토지개혁의 이상으로 삼았다. 한편 향촌사회의 안정적 통치를 중시하여, 「임관정요(臨官政要)」를 저술하면서 향사법(鄕社法)을 만들어 제시하였다. 나아가 ‘경안이리 동약’을 제시하여 사회경제적으로 백성들의 성장을 자율적으로 돕고, 이를 통해 국가가 성장하기를 기대하였다.

박사정(朴思正 : 1713~1787)의 본관은 반남(潘南)이며, 호는 농와(聾窩)이다. 경안면에 살면서 안정복과 교유하였다. 개인 문집과 「가례작통(家禮酌通)」 4권을 남겼지만 현전하는 문헌은 한 편도 없다. 다만 남하정이 지은 「동소만록」에 발문(跋文)이 남아 있는데, 서인·노론이 주도하는 당대 정치현실을 비판하면서 엄정하고 공정한 통치원리가 확립되어 올바른 정치를 기대한다는 내용이다.

황덕길(黃德吉: 1750~1827)의 본관은 창원(昌原)이며, 호는 하려(下廬)이다. 1774년 안정복 문하에 들어간 이래 1791년 스승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17년 동안 양천과 덕곡을 왕래하면서 수학했으며, 스승의 사후에는 양천에 칩거하여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이때 성호학파의 핵심적인 학풍을 담고 있는 문헌들을 읽고 가르쳤는데, 이러한 작업은 근기 남인계 실학 전통을 계승·발전시켜 가는 과정이었다.

허전(許傳 : 1797~1886)의 본관은 양천(陽川)이며, 호는 성재(性齋)이다. 21세 되던 해 서울로 올라와 황덕길 문하에 들어가 약 10여 년간 수학하였다. 39세에 과거에 합격한 후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치며, 성호문인 중에 가장 다양한 관력을 보유하였다. 이익의 균전(均田) 이념을 계승한 토지개혁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권철신(權哲身 : 1736~1801)의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호는 녹암(鹿庵)이다. 어려서 부친 권암(權巖)을 따라 안정복 문하에 들어가 수학했으며, 이익에게서 학자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소양에 대해서 가르침을 받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익으로부터 전수된 자득(自得)의 학풍을 중시하고, 일상생활에서 꼭 필요한 덕목을 실천하는데 노력하여 서학, 즉 천주교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소장학자들과 천주교 관련 서적을 돌려가며 읽고 자발적으로 공부함으로써 교리를 자득하였을 뿐 아니라, 신앙의 차원으로까지 확대시켰던 것이다.

권일신(權日身 : 1742~1791)의 본관은 안동이며, 호는 직암(稷菴)이다. 형 권철신과 함께 안정복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이익의 가르침을 받기도 하였다. 안정복의 딸과 결혼하여 사위가 되었다. 자득의 학풍을 계승하여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수립하였는데, 이러한 면모는 양명학(陽明學)의 수용에서 잘 나타난다. 다양한 사물에 대해서 관심을 두었고, 이승훈(李承薰)으로부터 영세를 받아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정약전(丁若銓 : 1758~1816)의 본관은 나주(羅州)이며, 호는 손암(巽庵)이다. 1776년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와 이익의 학문을 접하였고, 권철신에게 나아가 학문을 전수받았다. 서학에 관심이 있어 이벽·이승훈 등과 교유하면서 천주교를 신봉하게 되었고, 1801년에 신유박해 때 흑산도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복성재(復性齋)’를 짓고, 저술활동에 전념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는 「자산어보(玆山魚譜)」·「논어난(論語難)」·「동역(東易)」·「송정사의(松政私議)」 등이 있다. 이 중 유배지 흑산도에서 해양생물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진행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수산학 저서로 자연 사물을 이용후생의 관점에서 이해한 "자산어보"를 저술하였다.

정약용(丁若鏞 : 1762~1836)의 본관은 나주이며, 호는 다산(茶山)·사암(俟菴)이며, 당호는 여유당(與猶堂)이다. 이익의 학문을 사숙(私淑)하였으며, 성호문인들의 영향을 받으며 자신만의 독창적인 학문체계를 완성하였다. 그는 주자를 뛰어난 유학자이자 경전 해석가로 인식했던 반면에 주자의 학문을 무조건 숭상하려는 태도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자신의 학문세계에 많은 영향을 준 이익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이런 방식을 통해 자신만의 학문체계 수립한 정약용은 스스로 깨달은 내용을 적극적으로 사회현실에 적용하려 노력하였다. 공부의 목적을 민생안정과 같은 현실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것으로 규정하면서, 치민(治民)·변속(變俗)·이재(理財) 등 대한 지식을 중요하게 보았다. 저서로는 「경세유표(經世遺表)」·「목민심서(牧民心書)」·「흠흠신서(欽欽新書)」 등이 있다. 「경세유표」는 국가운영 전반에 대한 변혁을 통해 보민(保民)·안민(安民)을 이룰 수 있다 여기며 정치ㆍ경제 제도를 개혁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목민심서」에서는 체제 개선을 위한 구체적인 지방행정 관련 업무를 집대성하였다. 「흠흠신서」는 형법 연구서로 공정한 형정(刑政) 집행을 통해 백성들의 억울함을 덜어주려는 애민정신이 담겨 있다. 그는 유형원 이래 성호학파를 거치면서 현실화의 계기를 모색해 나아가고 있었던 실학의 개혁 전통을 집대성함으로써 조선 최고 실학자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이벽(李檗 : 1754~1785)의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호는 광암(曠菴)이다. 이익 문하의 이가환·정약용·이승훈·권철신 등과 교유하면서 자신만의 성리학설을 마련하였다. 그는 경전해석에 독창적인 면모를 갖고 있었다. 특히 「중용」에 대해 전통적인 이해방식에서 벗어나 하늘을 완전한 인격적인 존재로 보았으며, 이러한 인식을 통해 마침내 하늘을 천리가 아닌 천주(天主)로 파악하고, 우주생성의 주인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천주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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