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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른 쪽빛이 배어있는 광주

천진암과 한국천주교

천주교 발상지, 천진암

천진암(天眞菴)은 원래 퇴촌면 우산리 앵자봉 아래에 있는 사찰로, 1779년을 전후하여 폐찰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 천진암에서 한국 초기 가톨릭교 신자였던 이벽·권철신 등이 최초로 가톨릭 교리를 강론하고, 나아가 신앙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로부터 천진암은 한국천주교회의 발상과 관련된 중요한 사적지로 주목받게 되었다.

1770년대 이벽·이승훈·정약전·정약종·정약용 등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의 젊은 선비들은 이곳에서 자발적으로 모여 학문연구와 강학활동을 전개했다. 1770년부터 1784년까지 약 15년간 독서와 강학활동에서, 광암 이벽의 지도아래 태양력 계산법과 기하원본, 천문, 지리, 양명학, 천학(天學), 수학 등을 배웠으며, 그 결과 천주교를 학문적인 대상만이 아니라 종교적인 신앙의 차원으로 승화시키고 발전시켰다.

양반과 상민의 사회 계급타파 운동과 일부일처제 등을 실천하면서 종교단체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연유에서 천진암은 유교의 젊은 선비들이 불교의 암자에서 천주교 교리를 연구하고 실천하며 천주교회를 세운 곳, 즉 한국천주교 발상지로서의 위상을 갖게 되었다. 게다가 세계에서 유일하게 선교사 없이 자발적으로 이러한 신앙생활이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받을 만한 역사의 현장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천진암은 한국천주교 발상지뿐 아니라, 이벽·정약용·이승훈 등 당시 개혁적인 젊은 선비들의 역사와 사상, 그리고 신앙과 대자연을 사랑하고 음미하는 내용으로 가득찬 문학적 성취의 산실로서도 주목된다. 특히 정약용은 이곳을 자주 찾아와서 많은 시를 지었는데, 15세 때부터 1827년 65세 때까지 50년간이나 이곳을 찾아 자신의 심정이 진솔하게 묻어나는 시를 읊었다. 이들 작품에서 정약용은 천진암과 그 주변 산천 및 야생동물, 자연현상에 대한 내용 뿐 아니라, 이벽의 사상과 그에 대한 애정, 나아가 자신의 사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들을 문학적으로 아름답게 승화시켰다.

천주교 박해와 순교지

조선 후기에 천주교라는 새 종교는 광주지역에서 자라나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새로운 사상·종교의 수용은 조선의 기존 가치 및 사상체계와 충돌하였으며, 특히 조상제사 문제를 통해 표면화되었다. 그 결과 천주교의 수용·확산 과정은 처음부터 이념논쟁과 함께 탄압과 박해로 이어졌고, 그 시초 역시 광주지역에서부터 출발하였다.

광주지역은 한국천주교의 발상지로, 중국에서 들어온 서학서를 통해 가장 먼저 천주교 신앙이 집단적으로 연구되고 실천되었다. 천진암·주어사에서의 강학을 통해 자연스럽게 천주교 신앙에 이르게 되었는데, 1779년 당시 이벽, 권철신, 권일신,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이승훈, 윤유일, 이존창, 이총억 등 주로 남인계 학자들이 참여하였다. 이후 천주교는 경기도 여주·광주·이천·포천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이어 충청도 내포·충주, 전라도 전주·진산 등지로 널리 전파되었다.

이처럼 서울과 광주 지역 학자들 사이에 천주교가 확산되자, 양반가문에서 물의가 일기 시작하였다. 1785년 3월경, 김범우의 집에서 교회예절을 거행하며 교리강좌를 하던 이벽과 정약용 형제, 권일신 부자, 이승훈 등이 추조들에게 적발된 이른바 을사추조적발사건이 발생했다. 교회의 지도급 인물들에게 박해가 가해지면서 양반 지도층 신자들인 이벽, 이승훈, 정약전 등도 박해를 받았다. 특히 천주교를 처음으로 전파하기 시작한 이벽의 가문에서는 가족들의 강한 압력과 더불어 아버지 이부만의 자살 소동이 있었고, 그 결과 이벽은 강제 연금 상태에서 무저항 단식투쟁과 기도 속에 1785년에 세상을 떠났다.

1791년에는 조상제사 문제로 진산사건이 발생하면서 권일신이 순교하는 등 이른바 신해박해가 일어났다. 1794년 12월, 조선에 몰래 입국한 신부 주문모의 선교활동과 관련하여 1795년 을묘박해가 일어나면서 윤유일과 최인길, 지황이 신부를 대신하여 1795년 6월 28일에 순교하였고, 이 사건으로 이승훈, 이가환, 정약용 등은 신자들이 많은 예산, 충주, 홍주(금정) 지방의 외직을 맡아 낙향하게 되었다.

한편 정조가 승하한 후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자행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1801년의 신유박해이다. 이 박해로 양근·광주 지방에서는 권철신, 권상문, 박중환, 심아기, 한덕운 토마스 등이 순교하였다. 이후 한국천주교회는 35년 동안 성직자 없이 평신도들만의 신앙공동체로 유지되었다. 이어 1839년에는 기해박해와 1846년 김대건의 체포를 계기로 일어난 병오박해가 이어졌다.

이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1840년대 들어와 한국천주교회는 안정을 되찾고 교우촌은 더 먼 곳까지 점차 확대되어 갔다. 하지만 1866년부터 1871년까지 지속된 최대 규모의 천주교 박해인, 이른바 병인박해가 전개되면서 전국적으로 수많은 순교자들이 생겼다. 광주유수부에서도 1866년 1월부터 판관 정기명의 주도아래 오가작통법에 따라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색출되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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