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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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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소개

푸르른 쪽빛이 배어있는 광주

읍,면,동의 유래

광주의 지명유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미 발간된 관련 문헌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 몇 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여지도서輿地圖書』(1760)
  2.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06)
  3.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경기도편京畿道篇』(1910년대)
  4. 『경기 땅이름의 참모습』(경기문화재단, 2008)
  5.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新舊對照朝鮮全圖府郡面里洞名稱一覽』(1917)
  6. 『지방행정지명사地方行政地名史』(내무부, 1982)
  7. 『광주의 지명유래』(광주문화원, 2005)

『여지도서』는 영조대에 전국을 대상으로 편찬된 지리지로 군․현 단위의 면과 리․동의 명칭이 구체적으로 등장하는 문헌이다. 현 광주시 지명이 세부적으로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검토해야 할 자료이다.『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과 『조선지지자료-경기도편』에는 조선후기부터 1910년대 초 시기의 광주의 행정구역, 산, 하천, 자연마을, 골짜기, 들판, 고개, 길 등 다양한 지명이 보인다.

『경기 땅이름의 참모습』은 『조선지지자료-경기도편』에 대한 구체적인 해제와 함께 1910년대 전후의 원元 광주(서울시 강남․강동․송파구를 비롯하여 현 광주시, 성남시, 하남시, 의왕시 권역 등)의 방대한 지명이 수록되어 있다.『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은 1914년부터 1917년까지 일본이 조선의 행정구역을 대대적으로 통폐합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이때 광주시도 큰 변화를 겪었음은 물론이다. 『지방행정지명사』는 전국적인 행정지명을 다루고 있어 자세한 내용의 서술보다는 간략하고 전반적인 읍․면․동의 유래를 다루고 있다.

이러한 자료가 광주시 지명유래 조사와 연구를 위한 기초자료라고 한다면 『광주의 지명유래』는 문헌자료를 바탕으로 현지조사를 가미한 본격적인 지명유래 개설서라고 할 수 있다. 수록 대상은 연혁을 비롯하여 2005년 당시 10개 읍․면․동의 유래, 자연마을, 문화유적, 인물, 민속 현황, 산, 하천, 들판, 고개 등 광주의 향토문화 전반을 언급하면서 조사 가능한 지명을 총망라한 것이다.

시․군의 향토문화에서 지명유래가 차지하는 위상은 절대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지 지명과 유래에 대한 소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살아왔던 사람들의 생활방식, 설화 및 전설, 크고 작은 사건과 사고, 희로애락 등 시․군의 종합적인 향토문화상이 그 속에 누적되어 있기 때문이다.

『광주의 지명유래』에 소개된 자연마을은 10개 읍․면․동 74개 리에 371개이다.

  1. 오포읍의 유래
    ‘오포五浦’는 곧 오보五洑로, 관내에 경안천을 중심으로 역말보(양벌리), 양촌보(양벌리), 허산이보(고산리). 딴뫼보(매산리), 구머니보(매산리)의 다섯 보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 고산리(高山里)
      행정구역 개편시에 고잠리(高蠶里)와 허산리(許 山里)를 묶어 '고산리'로 부르게 되었다. 그것은 이 마을 뒷산인 문형산(文衡山)이 높다는 뜻으로도 우연히 일치하게 되었다.
      • 고잠리(高蠶里)
        이 마을은 지대가 높은 곳인데 여기서 누에를 많이 쳤다고 해서 높을고자와 누에잠자를 따서 '고잠동'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 구미동(九美洞)
        조선조 때 어느 지관이 이 마을의 형태를 보고 '거북이의 꼬리'같다고 해서 '구미'(龜尾)라 하고 달리 '九尾' 또는 '九美'라 쓰기도 한다.
      • 허 산(許山)이
        조선조 후기에 허산(許山)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힘이 장사이어서 인근에 소문이 크게 났었다고 한다. 따라서 '허산이'라는 인명이 결국은 지명으로 변하여 이 마을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 양벌리(陽筏里)
      행정구역을 통폐합할 때 양촌리(陽村里), 벌리(筏里), 둔전동(屯田洞) 세 자연부락을 묶어 '양벌리'(陽筏里)라고 했던 것이다.
      • 양촌(陽村)
        조선조 후기부터 이 마을에는 양(楊)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집단으로 거주하였다고 하는데, 그리하여 마을이름을 '楊村'이라고 하다가 후일에 '陽村'으로 쓰게 되었다고 한다.
      • 벌(筏)말
        이 마을 앞에 넓은 농경지가 있어서 '벌촌(筏村)이라 부르게 되었다.
      • 둔전(屯田)말
        고려시대부터 지방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의 식량을 대기 위하여 군사들의 힘으로 농경지를 개척하는 밭을 '둔전'(屯田)이라 하는데 이 마을이 바로 그러한 마을이었다. 따라서 이름을 '둔전말'이라 부르게 되었다.
      • 새터
        원래 새피네 장터에 살던 사람들이 을축년 홍수에 마을이 모두 침수되자 벌교(筏橋)를 중심으로 새로운 부락을 형성하고 이 마을을 '새터'라 부르게 되었다.
    • 추자리(楸自里)
      행정구역 통·폐합 시에 자연부락인 추곡리(楸谷里)와 자작리(自作里)를 합하여 '추자리'라 부르게 되었다.
      • 가래울
        이 마을에는 예부터 가래가 많아서 '가래골'이라 하였는데 모음 아래서 ㄱ이 떨어져나가 '가래올'이라 하다가 '가래울'이라 부르게 되었다.
      • 자작동(自作洞ㆍ자작이)
        조선조 선조 때 경원부사를 지낸 정응규(鄭應圭)라는 사람이 이 마을에 정착하여 일가를 이루어 '자작일가' (自作一家)라 했다고 하여 '자작동' '자작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 매산리(梅山里)
      행정구역 통·폐합 시에 매곡리(梅谷里), 독산리(獨山里), 외곡리(外谷里) 세 마을을 합하여'梅山里'라 부르게 되었다.
      • 매곡동(梅谷洞)
        조선조 초기에 어느 지관이 이 곳을 지나다가 이 땅이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이라 하였다고 하여 이 마을을 '梅谷里'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 독산동(獨山洞ㆍ딴뫼)
        이 마을 뒤편에 묘(墓)같이 생긴 산이 따로 떨어져 있다고 해서 이 마을을 '딴뫼'라 하고 한자로 '獨山洞'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 외곡동(外谷洞ㆍ밧골)
        옛날에 이 마을에 백마산(白馬山)의 줄기기가 두 갈래로 갈라진 곳에 매곡동(梅谷洞)이 있고 그 밖에 이 마을이 위치하고 있다고 해서 '밧골'이라 하고 한자로는 '外谷洞'이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 신현리(新峴里)
      고려 말의 충신인 상촌(桑村) 김자수(金自粹) 묘가 자리하면서 마을이 생겨났다. 이 마을은 원래 '상이리'(上二里)라 부르다가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뜻으로 '신현리'(新峴里)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 신촌(新村ㆍ새말)
        웃말에서 살던 사람들이 도적이 하도 심하여 이 마을에 모여 '새로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하여 '새말'이라 부르게 되었다.
      • 태현(台峴ㆍ태재)
        고려 말의 병조판서를 지낸 김자수의 묘를 이곳에 쓰게 되면서, '태재'라 부르게 되었는데, 광주시과 성남시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으며 김자수 신도비와 사당은 당초 태재에 있었으나 도로공사 관계로 묘역 하단으로 이전하였다.
      • 동막(東幕)골
        옛날에 어느 농부가 이곳에 새로 농경지를 개간하려고 농막을 치고 살았는데 그 동쪽에 형성된 마을이라고 해서 '동막골'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 퉁접골
        조선조 말기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이 천주교를 박해하자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에 모여 유기를 만들어 살았다고 하여 이 고을을 '퉁접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 능평리(陵坪里)
      고려 말 충신인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가 개성에서 죽어 충남으로 장례행렬이 지나다가 풍덕천(豊德川)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명정(銘旌)이 바람에 날려 이곳에 떨어지므로 이곳에 묘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1917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에 이곳의 일부가 용인시에 편입되었는데 그 후에 용인시 쪽에는 능원리(陵院里)라 부르고, 광주시 쪽에는 '능평리'라 부르게 되었다.
      • 광주(廣州)말
        행정구역 개편당시에 능원천을 중심으로 갈라져 용인쪽은 '용인말'이라 하고 광주쪽은 '광주말'이라 부르게 되었다.
      • 창(倉)뜰
        조선조 초기에 이곳에는 남한산성으로 가져가는 군량미를 보관하는 창고가 있었기 때문에 이곳을 '창뜰'이라 부르게 되었다.
      • 용산(龍山)골
        옛날에 이 마을에 살던 龍이 승천하려다가 사람의 눈에 띄어 승천하지 못하고 웅크린 채 산이 되었다고 해서 이 마을을 '龍이 산이 된 마을'이란 뜻으로 '용산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 수레실
        남한산성으로 군량미를 나를 때 수레에 싣고 다녔다고 해서 이 마을을 '수레실'이라 부르게 되었다.
      • 능(陵)골
        이 곳에 정몽주 선생의 묘를 쓴 이후에 이 마을을 '능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 문형리(文衡里)
      고려조 말에 어느 예문관 대제학(大堤學)이 내려와 이곳에 쉬면서 마을 주위의 경치가 하도 아름다워 이 산을 문형산이라 하였고 이 후에 이 마을을 또한 '문형리'라 하게 되었다.문형이라 뜻은 대제학의 별칭이다. 본래는 이 산에 문수보살을 모셨다고 하여 문수산(文殊山)이라고 하였었는데, 앙불숭유(仰佛崇儒)에서 명칭이 바뀌었던 것이다.
      • 되치미
        장마철만 되면 땀 흘려 지어놓은 농사가 둑이 무너져 물에 떠내려 가곤했는데 그럴 때마다 힘들여 둑을 쌓으면 또 떠내려 가고 해서 '다시 친다'는 뜻을 '되치미'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 봉골
        이 마을 뒷산인 문형산에는 기암괴석이 많아 예부터 부엉이가 많이 서식하였다고 하여 마을이름을 '부엉골'이라 불렀는데 이 말이 변하여 '봉골'이 되었다고 한다.
      • 진해촌(眞海村ㆍ참바대)
        옛날에는 이곳이 바다였다고 하여 마을이름을 '참바대'라 하고 이를 한자로 고쳐 진해촌이라 부르게 되었다.
  2. 초월읍의 유래
    자연과 달이 어우러진다는 뜻으로 ‘초草’는 자연을, ‘월月‘은 무갑산 정상에 떠오르는 달을 생각하여 붙였다고 한다. 초월읍의 지형이 초승달 같아서 초월初月이었다가 초월草月로 바뀐 것이라고도 한다.
    • 대쌍령리(大雙嶺里)
      경안동에서 곤지암으로 향하여 가면 크고 작은 고개 2개가 연이어 나타나는데 이곳에 위치한 마을이란 뜻으로 '대쌍령리'라 부르게 되었다.
    • 선동리(仙東里)이 마을은 대한제국(大韓帝國)시대까지는 선장동(仙掌洞)과 하동막동(下東幕洞)으로 나누어져 행정구역을 이루고 있었는데, 1914년 일제(日帝)가 행정구역을동(東)을 통폐합하면서 선장동(仙掌洞)의 선(仙)과 하동막동(下東幕洞)의 동(東)을 따서 선동리(仙東里)라고 이름 지었다.
    • 용수리(龍水里)
      이 마을의 한 부잣집에 시주를 구하는 스님에게 시주 대신 쇠똥을 준 부자가 스님의 지시대로 건너편에 있는 자기 조상의 묘 앞에 망두석을 세우려고 팠다가 물이 나와 내를 이루었으며 산은 용의 머리모양으로 변했다고 한다. 이리하여 이 마을을 용용자, 물수자를 따서 '용수리'라고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 수입(水入ㆍ무드리)
        이 마을로 '물이 들어온 곳'이란 뜻을 '물들이'라고 하였는데 이 말이 변하여 '무드리'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 용두(龍頭)
        이 마을이 자리잡은 산의 형태가 마치 용의 머리 같이 생겼다고 해서 '용두'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장담(長潭)
        이 마을 뒷산이 용머리처럼 생겼는데 이곳에서 물이 흘러 내를 이루었는데 장마만 지면 이 마을이 물에 잠긴다고 해서 '長潭'이라 부르게 되었다.
    • 지월리(池月里)
      행이 마을 한 가운데 못이 있어서 처음에는 이 마을을 '지곡'(池谷)이라 하였는데 여기에 달이 비치면 매우 아름답다고 해서 '지월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초월읍에서 '월'자를 따서 '지월리'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 설월(雪月)
        경상도에 사는 어느 선비가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가는 길에 이곳에서 하룻밤 묵게 되었는데 한밤중에 눈이 내리고 눈이 그치자 그 위에 달빛이 비치는 것이 마치 선경(仙境)처럼 아름다웠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마을을 '설월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경수(鏡水)
        조선조 선조시대에 낙향하여 이곳에서 살던 노은(老隱) 김정림(金正立)이 명경지수(明鏡止水)란 말에서 두 자를 따서 '경수'(鏡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하고, 혹은 이 마을 앞으로 흐르는 냇물이 거울같이 맑고 깨끗해서 '경수'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 학동리(鶴東里)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에 상동막(上東幕), 중동막(中東幕), 학현(鶴峴) 세 마을을 통합하여 '학동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상동막(上東幕)
        이 곳의 지형이 마치 막(幕)을 둘러친 것과 같다고 해서 막동(幕洞)이라 했는데 이 위쪽을 '상동막' 그 아래쪽을 '하동막'이라 부르게 되었다고한다.
      • 학현(鶴峴ㆍ하오개)
        이 마을 앞에 고개가 있는데, 이 고개에는 학이 많이 서식했다고 하여 마을이름을 학(鶴)과 고개(峴)를 합하여 '鶴고개'라 불렀는데 이 말이 변하여 '하고개ㆍ하오개'라 하게 되었다.
    • 신월리(新月里)
      이 마을의 형태가 마치 초승달과 같이 생겼다고 해서 '신월리'라 하게 되었다고 하고, 또 일설에는 원래 이 마을이 못골(池谷)에 일부였으나 행정구역 개편 때 새로 독립된 마을이라 해서 '신월리'라 하게 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 두월(斗月)
        이 마을의 형태가 반달같이 생겼다고 해서 반(半)을 두(斗)로 고쳐 '두월리'(斗月里)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또 어떤 설에 의하면 이 마을 밭에서는 수수가 유난히 잘되어 방망이로 두드린다고 해서 '두 달이', 즉 '斗月이'가 되었다고 한다.
      • 탄동(炭洞)
        조선조 말엽에 숯을 구워서 한양에 내다 팔아 생계를 잇는 사람들이 이 마을에 집단으로 거주했다고 해서 '탄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사기막(沙器幕)골
        이 마을에는 사기그릇을 굽던 사기막이 있었다고 하여 '사기막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쌍동리(雙東里)
      쌍동리(雙東里)는 조선조(朝鮮朝)말까지 소쌍령리(小雙嶺里)와 동산리(東山里)로 나누어 있었으나, 1914년 일제 강점기에 행정구역을 축소 개편하면서 소쌍령(小雙嶺)과 동산(東山)을 합쳐 쌍동리(雙東里)로 하였다. 소쌍령은 '오리나무쌍령' 이라고도 하는데, 초월읍의 대쌍령리로부터 3번 국도를 따라 곤지암 방면으로 작은 고개를 넘어서서 우측으로 형성되어 있는 마을이다. 동산은 소쌍령에서 곤지암 방면으로 가다가 우측으로 속칭 '도-골'이라는 마을이다. 쌍동리의 중심마을이다. 이 마을에 도곡초등학교가 있다. 전주 이씨의 세거 마을인 둔전말이 소쌍령과 동산 사이에 있다.

      광주시에는 쌍령이라는 낱말이 들어가는 마을이 세 곳이 있다. 즉 경안동(전 廣州邑)의 쌍령동(雙嶺洞)이 있고, 초월읍(草月邑)의 대쌍령리(大雙嶺里)와 소쌍령(小雙嶺)마을이 그것이다.
      쌍령이란 령(嶺)이 나란히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경안동의 쌍령동에서 고개를 넘어 오면서 영(嶺)이 있고, 대쌍령리를 지나면 바로 또 작은 영(嶺)이 있어 '쌍령'(雙嶺)이라고 부른다.

      쌍동리는 광주시청에서 3번 국도를 따라 곤지암 방면으로 약 6km 거리에 있으며, 초월읍소재지인 대쌍령리를 북쪽으로, 초월읍 산이리(酸梨里)를 남쪽으로 하고 있으며, 서쪽으로 백마산을 넘으면 오포읍의 양벌리가 된다. 동쪽으로는 곤지암천을 경계로 초월읍 용수리(龍水里)가 된다.

      쌍동리의 문화유적

      • 쌍동리 지석묘(支石墓)-고인돌
        쌍동리 15번지에는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의 선사유적(先史遺跡)으로 지석묘가 발견되어 현존하고 있다. 3번 국도 도곡마을 민가에 위치하고 있다.
      • 조선백자 도요지
        15세기에서 16세기의 상감청자ㆍ분청사기와 백자가 1986년에 발견되었다.
      • 쌍동리 느티나무
        300년 된 느티나무가 쌍동리 173번지에 있는데, 광주시 보호수제55호로 지정되어 있다.
      • 작은쌍령(오리나무쌍령)(小雙)
        조선조 말에는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소쌍령리였으나, 일제 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동산리(東山里)와 합치면서 쌍동리(雙東里)가 되었고 오리나무가 무성하였다 하여 '오리나무쌍령' 이라고도 부른다.이 마을은 백마산 줄기 밑에 있어 농경지는 많지 않아서 대부분의 논농사는 동산(도-골)앞의 논을 경작하였다.
      • 동산(도-골ㆍ도곡)
        쌍동리의 중심 마을이다. 길옆 골짜기 밑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도곡'(道谷)이라 하였는데, 일설에는 도기를 굽는 마을이라 하여 '도-골'(陶谷)이라고 하였다고도 한다. 앞말과 뒷말로 이루어 졌으며, 이 마을에 도곡초등학교가 있고, 마을 앞들이 비옥하여 논농사가 활발하였다. 양천 허씨(陽川 許氏)가 조선조 중기에 입향(入鄕)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 둔전말(屯田)
        이 마을은 예전에 둔전(屯田)이 많았다고 하여 '둔전말' 이라고 하였다. 전주 이씨 효령대군 후손들이 세거하여 왔고, 도골의 서북쪽에 있다 10여 호가 이어져 오고 있다.
      • 백운암
        백마산 밑 중턱에 있는 절이다.
      • 벼락바위
        도-골 뒤에 있는 바위인데, 예전에 이 바위틈에 지네가 많아 사람을 해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어느 땐가 큰 벼락이 쳐서 이 바위가 쪼개지면서 그 지네들이 모두 죽어 없어졌다고 한다. 그 뒤로 '벼락바위'라고 하였다.
      • 마루들
        지금의 도곡초등학교 뒤로 천수답(天水畓)으로 이루어진 들이다. 수리시설(水利施設)이 없어 하늘만 쳐다보고 비가 오기만을 기다렸다가 모를 심는 들이라 하여 '마른들'이 변하여 '마루들'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 사정터
        도곡초등학교 앞산 구릉을 말하는데, 예전에 이 곳에서 활을 쏘며 군사연습을 하였다고 하여 '사정터' 라고 부른다.
      • 굴바위
        도골 마을 뒷산에 있는데, 바위에 굴이 장정 20여 명이나 들어갈 수가 있다.
      • 무당수
        백마산 중턱에 있는데, 골짜기에서 물이 흘러 내려오다가 웅덩이가 된 곳으로 가물 때는 물이 없다. 비를 기다리는 마을 아녀자들이 무당과 더불어 이 곳에서 굿을 하고 함께 춤추면 비가 내렸다는 전설이 있다.
      • 도골 보(洑)
        도골 마을 앞의 들을 보들 또는 중보들이라고 하는데, 이 곳에 물을 대고 농사짓기 위하여 만든 보(洑)를 말한다. 보의 위치는 곤지암천에 있다.
      • 말바위산
        쌍동리와 산이리 사이에 있는 작은 산인데, 산 정상에 무쇠로 만든 말 형상의 조각이 예전에 있었다. 그런데, 이 말의 궁둥이가 향한 쪽의 마을은 풍년이 든다고 하여 산에 올라가는 사람이 저마다 자기 마을 쪽으로 말 궁둥이를 돌려놓았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 장사바위
        말바위로 올라가는 능선 우측에 있는 바위인데, 예전에 어느 장사가 이 곳에 발자국을 남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지금도 그 발자국이 선명하다.
      • 팔학산(八鶴山)
        쌍동리 도곡 마을 뒷산 복판에 골짜기가 여덟 개가 있는데, 마치 학이 여덟 마리가 앉아 있는 형국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예비군 훈련장이 되었다.
      • 장군봉
        팔학산 우측에 있는 산봉우리를 '장군봉'이라고 부른다.
      • 농바위
        말바위 아래에 있는 바위로서 농부들이 일을 하다가 잠시 쉬고 놀 수 있는 편편한 큰 바위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 넙적바위
        백운사 절 위에 있는 크고 넓은 바위를 말한다.
      • 서울배기
        백마산 정상에 있는 해발 502m 고지인데, 이 고지에서 서울이 보인다고 하여 '서울배기'가 되었다.
      • 물탕바위
        서울배기 산 아래에 있는 약수터가 있는 곳의 바위인데, 예전에 서울의 양반이 앉은뱅이 병에 걸려 가마를 타고 이 곳에 와서 약수를 먹고 일어나 걸어갔다는 전설이 있다.
    • 도평리(島坪里)
      이 마을은 곤지암천이 둘러 흐르므로 마치 섬처럼 되었다고 해서 예부터 '섬뜰'이라고 했는데 이를 한자로 '島坪'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위쪽에 위치한 부락은 '상도평', 아래쪽은 '하도평'이라고 한다.
    • 산이리(酸梨里ㆍ신배골)
      이 마을에서는 신맛나는 배가 생산된다고 해서 '산이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점(店)말
        이 마을은 독을 구울 때 쓰는 점토가 많이 생산된다고 해서 '점말'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지금도 이 마을에는 독점이 있다.
    • 서하리(西霞里)
      이 마을 옆을 흐르는 경안천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며, 또 이 물줄기로 인하여 안개가 자주 낀다고 해서 '서하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사마루(四馬樓)
        고려말에 충신 4명이 말을 타고 이 마을 곁을 지나다가 잠시 이 마을을 돌아보니 그 형태가 마치 누각(樓閣)처럼 생겼다고 해서 이 마을을 '사마루'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안골
        원래의 큰 부락이 있는 안쪽에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고 해서 '안골'(安谷)이라 부르게 되었다.
    • 무갑리(武甲里)
      이 마을 뒷 편에 해발 400m나 되는 산이 있는데 옛날에 이곳에서 '무인(武人)'이 입던 갑옷(甲胃)이 나왔다고 해서 이 마을을 '무갑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무래비
        무인(武人)의 갑옷이 나왔다는 이 산에는 높고 험한 고개가 있는데 행인들이 이 고개에서 쉬어 넘었다고 해서 '무래비'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늑현리(勒峴里)
      이 마을 어귀에 있는 고개가 마치 말 굴레(勒)처럼 생겼다고 해서 '굴레고개'라고 했는데 이 마을이 변하여 '구러개'가 되었으며, 한자로는 '勒峴里'라고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3. 곤지암읍의 유래
    조선 중기 무장인 신립장군의 묘와 신립장군 고사에 등장하는 '곤지암'이 있는 곳으로, 2011년 행정구역 명칭을 실촌읍에서 곤지암읍으로 변경하였다.
    • 곤지암(昆池岩)리
      조선조 중기에 임진왜란 때 패전장인 신립(申砬)장군의 표가 있었는데, 그 곳에 조금 떨어진 곳에 고양이 모양의 바위가 있었다고 한다. 말을 타고 이 바위 앞을 지나가면 말굽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한 장군이 그 앞을 지나다 '패전장군이 무슨 체면으로 지나는 행인을 괴롭히느냐'고 큰 소리를 쳤더니 갑자기 천둥번개를 치면서 바위가 두 쪽으로 나버렸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 후부터는 고양이 모양의 바위가 없어졌다고 한다.
      • 곤재(昆在)
        곤지암리의 본동을 일컫는 말로 '곤지암이 있는(在) 곳'이란 뜻이다.
      • 다석동(多石洞ㆍ대대미)
        이곳에는 땅을 파보면 돌이 많이 나온다고 해서 '다석동'이라 하였는데 그 후에 '대석'이라 부르기도 하고, 또 파낸 돌로 담(牆)을 쌓았다고 해서 '대대미'라 부르기도 한다.
      • 묵방(墨防ㆍ먹방)
        조선조 인조 때 이활(李活)이 난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이천쪽으로 도망가던 중 이곳 노상에서 잡혀 처형된 일이 있는데 '모반하는 검은 마음을 방지하였다'고 해서 '묵방' 또는 '먹방'이라고도 한다.
    • 수양리(水陽里)
      자연부락인 구수동(九水洞)과 구양동(九陽洞)을 합하여 수양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 구양동(九陽洞ㆍ갱이)
        이 마을 양지 바른 곳에 거북이 모양의 큰 바위가 있다고 해서 '구양동'이라고 했으며, 고양이를 줄여서 '갱이'라고도 한다. 또 이곳을 '안구시울'이라고도 부른다.
      • 복상(伏象)골
        이 마을 형태가 마치 코끼리가 엎드려 있는 것 같다고 해서 '복상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 돌문이
        옛날 이곳에 돌을 쌓아 만든 큰 돌문이 있었다고 해서 마을 이름을 '돌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 명신촌(明新村ㆍ어둠골)
        마을이 높은 두 산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서 이웃 사람들이 이 마을로 품앗이를 오면 일찍 해가 져서 어두워진다고 해서 '어둠골'이라 했는데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이 마을 사람들이 밝기를 기원하는 뜻으로 '명신도'이라 하게 되었다.
    • 이선리(二 仙里)
      이 마을에는 삼선당(三仙堂)이라는 당이 있었고, 또 양 골짜기에는 때때로 두 신선이 내려와서 놀다 갔다고 하여 '이선리'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 삼합리(三合里)
      행정구역 당시에 국정포(國井浦), 야포(冶浦), 지음(智音)의 세 자연부락을 합하였다고 해서 '三合里'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 국정포(國井浦ㆍ국정개)
        고려 말기 공민왕이 부하를 거느리고 이곳에 피신해 왔을 때 이 곳의 샘물로 식수를 삼았다고 해서 '국정' 또는 '국정포'라 하게 되었다.
      • 지음(智音ㆍ징골)
        고려 말기에 이곳에 피신해온 공민왕이 매일 음주가무를 즐겨 징소리가 주위에 널리 퍼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징골'이라 하게 되었다는데 이는 '점골'이 변한 말로 보인다.
      • 야포(冶浦ㆍ풀무개)
        천덕봉으로 피신 온 고려 군사들이 원나라와 싸울 때, 이곳에서 풀무질을 하여 무기를 만들었다고 하여, 이 마을을 '풀무개'라고 하였다고 한다.
    • 만선리(晩仙里)
      이 마을에 살던 신선이 이선리에 있는 삼선당에 놀러갈 때 늘 늦었다고 하여 '만선리'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 만들
        이선리에 있는 삼선당에 놀러갈 때는 늘 늦는 신선이 이곳에 살았다고 해서 '만들'이라 불렀다고 한다.
      • 탑동(塔洞)
        옛날에 이 마을에는 재앙이 자주 들어 마을 사람들이 합심하여 재앙을 쫓고 마을의 평안을 빌기 위하여 탑을 쌓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마을을 탑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자들이 이곳에 모여 유기를 만들어 살았다고 하여 이 고을을 '퉁접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 오향리(五香里)
      이 부락의 위치가 풍수지리설로 보아 오향(五香)이라 불렀으며, 그 후에는 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5개의 봉오리, 즉 감투봉, 먹자봉, 자주봉, 국수봉, 노적봉이 있어 이를 숭배하고 향기롭게 한다고 해서 '오향리'라 부르게 되었다.
    • 건업리(建業里)
      조선조 광해군 때에 밀양(密陽) 박씨의 조상이 이곳에 와서 터를 잡고 살게 되었을 때 마을의 안녕을 빌기 위하여 돌탑을 쌓았다고 해서 '건업리'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 동심(東深)이
        이 마을의 위치가 동쪽이 있는 깊은 골에 위치하여 있다고 해서 '동심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 진고개
        이 마을은 갈대가 우거진 데다가 땅이 유난히 질어서 보행을 하기 힘들 정도여서 마을이름도 진고개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 봉현리(鳳峴里)
      이 마을 곁에 있는 봉재(鳳峴)라는 산이 있는데 행정구역을 개편할 당시 이 마을을 '봉현리'라 부르게 된 것이다.
      • 설월리(雪月里)
        이 마을은 산에 가려진 음지이기 때문에 겨울에 눈이 오면 늦은 봄까지도 눈이 녹지 않는다고 해서 '설월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새재
        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의 형태가 마치 새가 앉아 있는 듯하다고 해서 '새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부항리(釜項里)
      행정구역을 통폐합할 당시 부곡동(釜谷洞)과 우항동(牛項洞)을 통합하여 '부항동'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 부곡동(釜谷洞ㆍ가마을)
        이 마을의 형태가 마치 가마솥처럼 속이 우묵하게 생겼다고 해서 '가마골'인데 ㄱ이 탈락하여 '가마을'이 되고 이것이 다시 줄어 '개말'이라고도 한다.
      • 우항동(牛項洞ㆍ소목재)
        이 마을의 형태가 마치 소가 목을 쭉 빼고 있는 모양인데 주민들이 넘나다니는 고개가 바로 소의 목부분이라고 해서 '소목재'라고 하게 되었으며 한자로는 '牛項洞'이라 하게 되었다.
    • 삼리(三里)
      행정구역을 통폐합할 당시, 내촌(內村), 평촌(平村), 잔교(殘橋)의 세 마을을 통합하여 '삼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 세교(細橋ㆍ잔다리)
        이 마을 한 가운데 하천이 흐르고 있는데 이 하천을 건너는 조그마한 다리가 있다고 해서 '세교'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신촌리(新村里)
      이 마을은 산 밑에 양지바른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새로 생긴 마을'이라고 해서 '신촌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인배(仁培)
        이 곳에는 배(裵)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집단으로 거주하였는데 이 사람들의 마음씨가 매우 어질다고 해서 마을이름을 '仁倍'라고 부르게 되었다.
      • 되때기
        이 마을은 산에 둘러싸여 마치 마을이 삼태기 안에 들어 있는 것 같고 농사가 잘된다고 해서 '되때기'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열미리(悅美里)
      옛날 이곳에는 명당자리가 많아 고관들의 묘가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처음에는 '십묘'(十墓)라 부르다가 이를 '열묘'라 하였는데 이 말이 다시 변하여 '열미'라고 하게 되었다고 한다.
    • 유사리(柳寺里)
      고려 말의 풍수지리사 박상희 이란 이가 이곳의 지형을 '유지봉소형(柳枝鳳巢形)'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또 이곳에 옛날에 절이 있다고 해서 버들유자와 절사자를 합하여 '유사리'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 버드나리(柳餘洞)
        예부터 이곳에는 버드나무가 많이 자라서 여름이면 오가는 길손들이 그 그늘에서 쉬어가기도 했다고 한다. 또 그 곁에 냇물이 흐르고 있어서 그 냇물과 합하여 '유천리'라 부르게 되었는데 우리말로는 '버드나리'라 한다.
      • 절골
        지금은 없어졌으나 옛날에 이곳에는 이 마을을 지켜준다는 절이 있어서 이 마을을 '절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 연곡리(蓮谷里)
      이 마을 중앙에 전주 이씨의 묘가 있는데 이 묘자리가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고 해서 '연곡리'라고 하였다고 하는데 일설에는 고려 말 때 천덕봉에 피신해 왔던 공민왕이 부항리(釜項里)에서 밥을 짓기 위하여 불을 때면 그 연기가 꼭 이쪽으로 불어온다고 해서'연곡(蓮谷)이라하고 우리말로는 '내실'이라고 했다고도 한다.
      • 새터
        예부터 이 마을에는 정자나무 세 그루가 있었는데 그 나뭇잎이 무성하면 풍년이 들고, 나뭇잎이 시들면 흉년이 든다고 해서 한 해의 길흉을 그것으로 점쳤다고 한다.이 마을 옆에 생긴 마을이라고 해서 '새터말' 또는 '새터'라고 한다.
      • 인굴(人窟)
        이 마을 뒷산 깊숙한 곳에 사람이 살던 큰 굴이 있다고 해서 이 마을을 '인굴'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장심리(長深里)
      이 마을은 조선시대까지 장재동(長在洞)과 동심리(洞深里)로 나누어져 있던 것을1914년 일제 강점기에 행정구역을 통폐합하여 '장심리'(長深里)로 하였다. 장재동의 '장'(長)과 동심리의 '심'(深)을 따서 지은 것이다. 이 마을은 만선리에서 국가지원지방도 98호선을 건너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아늑하고 조용한마을이다.
      • 조선백자 도요지
        이 마을 장재울 큰골에서는 15~16세기 조선백자 도요지가 발견되었는데, 주로 대접, 접시 등을 굽던가마터이다. 사옹원(司饔院) 분원(分院)이 있던 남종면에서 연료를 따라 이동하며생산할 때에 이곳에서 백자를 생산하였던 것이다.
      • 동심이(洞深里)
        만선리에서 장재울로 들어가는 입구 좌.우측에 형성되어있는 마을을 동심이라고 한다.
      • 장재울(長在洞)
        마을이 길고 깊은 골짜기 안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에 옛날에는 장작을 팔고 사는 시장(柴場)이 있었다고 하여 '장재울'이라고 불려왔다고도 한다.
    • 신대리(新垈里)
      나무가 우거진 이곳에 해방이후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했는데 '새로 터를 닦아 만든 마을'이라는 뜻으로 '새터말'이라 하고 한자로 고쳐서 '新垈里'라 하게 되었다 한다.
  4. 도척면의 유래
    백제 시조 온조왕이 한강유역에 도읍을 정할 때 이곳을 탐사하면서 수차례 답사하여 재고 또 재고하였으므로 되재-도척이 되었다고 한다.
    • 노곡리(老谷里)
      이 마을 뒷산이 노루처럼 생겼는데 이 마을은 그 목부분에 위치하고 있다고 해서'노루목'(老谷里)이라 했는데 행정구역 개편 시에 '老谷里'라 하게 되었다.
      • 노루목
        이 마을에서 상림리(祥林里)로 넘어가는 산의 생김새가 새끼노루가 어미노루를 바라보는 형상이라고 해서 '노루목'이라 부르게 되었다.
      • 고녹골
        이곳에 있는 논들은 풍부한 관개수로에 비옥한 땅이므로 '고은논'이라 불렀는데 여기에 비옥하다고 해서 옥자를 넣어 '고은, 옥, 골'이 합하여 '곤옥골'이 되고 다시 '고녹골'이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 진우리(鎭牛里)
      행정구역을 통폐합할 때에 진(鎭)말과 우치(牛峙)말을 합하여 '진우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양촌(陽村)
        조선조 후기부터 이 마을에는 양(楊)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집단으로 거주하였다고 하는데, 그리하여 마을이름을 '楊村'이라고 하다가 후일에 '陽村'으로 쓰게 되었다고 한다.
      • 옛진말
        현재의 진우리 공동묘지 밑에는 신안(新安) 주(朱)씨가 공동거주를 하고 있었는데 상여의 출입이 많은 곳이라 이곳으로 옮기면서 먼저 살던 곳이라고 해서 '옛진말'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 우치(牛峙)
        이 산에 있는 바위들이 하도 기암괴석이어서 이것을 갖다가 삼각산에 갖다 놓으려고 바위 구멍을 뚫어 소로 끌고 가다가 이 고개에서 소의 보줄이 끊어지는 바람에 소가 넘어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마을을 '소티'라하고 한자로는 '牛峙'라 쓰게 되었다.
      • 신대(新垈ㆍ새말터)
        예진말, 우치부락, 진말이 선서대로 형성된 다음에 새로이 이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해서 '새터말'이라 하고 한자로는 '新垈'라 쓰게 되었다.
      • 웃점말
        이곳의 토질이 질그릇 만드는 점토(粘土)이어서 '점말'이라 했는데 그 위치가 위에 있다고 하여 '웃점말'이라 한다.
      • 큰골
        이 말을 둘러싸고 있는 주위의 경관이 아름답고 큰 골짜기라고 해서 이곳을 '큰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 상림리(祥林里)
      이 마을 뒷산의 형태가 누에모양이고 이곳에서는 뽕나무가 잘 된다고 해서 '상림리'(祥林里)라 했는데 이를 후에 '祥林里'로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 사기소(沙器所)
        옛날에 이곳에서는 사기그릇을 굽던 곳이라고 해서 '사기소'라 하였다. 지금도 사기그릇 깨진 것이 많이 발굴되고 있는 곳이다.
      • 승방(僧房)터
        이곳은 산세가 좋아 부처님을 모시는 절을 지었으나 크게 발전하지 못하고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고 해서 '승방터'라고 부르게 되었다.
      • 시어골
        이곳에는 산세가 험준하고 맹수들이 많아서 '이곳에서는 살기 싫다'고 해서 '시어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방도리(芳都里)
      1917년 행정구역 개편 시에 '방등리'(芳登里)와 '내도척(內都尺)'을 합하여 '방도리'라 하게 되었다고 한다.
      • 되재
        속설에 의하면 이곳에 도읍을 정하려던 온조왕이 땅을 되풀이해서 재었다고 해서 '되재'라고 하였다고 하나, 이곳은 용인시과 접경지대라 산이 험준하여 넘나들이 '된 재'란 뜻은 '된재'가 변한 말인 듯하다.
    • 도웅리(陶雄里)
      조선시대에 이 곳에서는 질그릇을 만들어 팔러 다닐 때 넘던 '독고개'와 '옹골'(甕洞)을 합하여 '도웅리'라 부르게 되었다.
      • 고해(古海)
        도웅이 앞으로 흐르는 냇물이 예전에는 벼락바위 앞으로 흘렀는데 그때 이 냇물이 넓고 길어서 마치 바다 같다고 해서 '고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 독고개
        옛날에는 한양으로 옹기(甕器)를 팔러갈 때 넘던 고개라 하여 '독고개'(甕峴)이라 하다가 '웅골'로 변하여 부르게 되었다.
    • 유정리(柳井里)
      1910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에 '유여동'(柳余洞)과 '운정동'(雲井洞)을 합하여 '유정리'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 운정동(雲井洞ㆍ굴우물)
        이 마을에는 예부터 유명한 영천(靈泉)이 있었는데 여기에는 언제나 안개와 구름이 끼어 있어 '운정동'이라 하고 우리말로는 '구름우물'이라 했는데 이 말이 변하여 '굴우물'이라 한다.
      • 미륵동(彌勒洞)
        고려시대부터 노상에 버려두었던 석불(石佛)을 조선조 말기 진사(進士) 조희백(朝熙百)의 아내가 잘 모시자 낳지 못하던 득남을 했다고 한다. 이런 일이 있던 이후부터 이곳은 부처님을 모시는 곳이 되었으니 마을이름도 '미륵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 바위산골
        마을 주위에는 태화산과 미역산이 있어서 기암괴석이 많은데 마을이름도 '바위산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 궁평리(宮坪里ㆍ궁뜰)
      조선조 시대에 궁에서 내린 땅이라고 해서 이곳을 행정구역 수정 당시 '궁펑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일설에 의하면 백제시대 궁주의 땅이 있던 들(坪)이란 뜻으로 '궁뜰'이라 부르기도 한다.
    • 추곡리(楸谷里ㆍ가래실)
      조선시대에 서판서(徐判書)란 분이 피난처를 찾아 이곳에 정착하여 살기 위하여 큰 집을 짓고 둘레에 가래나무를 많이 심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곳을 '가래실'이라 했는데 이를 '추곡'이라 부르게 되었다.
  5. 퇴촌면의 유래
    조선 초기 개국공신 조영무趙英茂가 늙어서 광주에 내려와 호를 ‘퇴촌退村’이라 하고 은거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중정남한지』에는 고려말 왕王씨와 백白씨 성을 가진 두 사람의 상서尙書가 나라가 망하자 이곳에 내려와 살았으므로 이곳을 상서동이라 부른데서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 광동리(光東里)
      1923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에 '광복동'(光復洞)과 '동지벌촌(東地筏村)을 합하여 '광동리'라 부르게 되었다.
      • 광복동(光復洞ㆍ광백이)
        이 마을은 풍광(風光)이 아름답고 항상 햇볕이 가득한 마을이라고 해서 '光復洞'이라 하는데 속명으로는 '광백이'라 부른다.
      • 동지벌촌(東地筏村)
        조선조 인조왕대에 병자호란을 맞아 군량미를 전국 각처에서 거두어 드릴 때 이곳 넓은 벌판 마을에서 군량미를 가장 많이 내는 마을이란 뜻으로 '동지벌촌'이라 부르게 되었다.
    • 도수리(陶水里)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에 도지동(陶池洞)과 수동(水洞)을 합하여 '도수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도지동(陶池洞)
        이 마을에는 큰 연못이 있었고, 그 옆에는 도자기를 만들었다고 해서 '도지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 수동리(水洞里ㆍ참새미)
        옛날 이 마을에 살던 김생원이라는 집 앞마당에서 맑고 찬 샘물이 솟아 나와서 마을이름을 찬, 샘(泉)이라 뜻으로 '참새미'라 부르고 한자로는 '水洞里'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삼백(三白)골
        옛날에 이 마을에는 백씨 성을 가진 부자 세 사람이 살았는데 인심이 좋아 마을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인정을 베풀었다고 해서 '삼백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 탑선동(塔仙洞)
        조선조 초기에 이 마을에는 탑이 있었는데 속설에 의하면 이 탑에다 빌면 무엇이고 소원성취할 수 있다고 하여 마을의 처녀ㆍ총각들이 이 탑에 비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마을이름을 '塔仙洞'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수청리(水靑里ㆍ푸프레여울)우산리(牛山里)
      마을 주위에 있는 산의 형세가 마치 소가 누워있는 와우형(瓦牛形)이라고 해서 '우산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 박석(朴石)거리
        오래전부터 이 마을에는 박씨와 석씨가 집단으로 대를 이어 거주한다고 해서 '박석거리'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소미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의 형태가 앵소모양같이 생겼다고 해서 '앵소산'이라 하기도 하고 '소산'이라고도 하는데 그 산 밑에 위치한 마을이라고 해서 '소미'라 하게 된 것이다.
      • 절막
        앵자봉 주위에는 학문을 닦기 위하여 사람들이 공부하는 암자가 많았으니 천진암(天眞庵), 백년암(百年庵), 일출암(日出庵) 등의 있는데 그 가운데 천진암 아래에 위치한 마을이라고 해서 '절막'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도마리(道馬里)
      이곳에 사람을 괴롭히는 여우를 한 도공(陶工)이 죽이자 그 죽은 여우의 혼이 다시 사람을 괴롭혔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 혼을 누르기 위하여 질(陶)로 말(馬)을 만들어 여러 개를 이 고개에 세웠다고 한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이곳을 '도마리'(陶馬里)라 하였는데 그 후데 '道馬里'라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 관음리(觀音里)
      1923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당시에 관음동(觀音洞), 도장동(都長洞), 절골을 통합하여 '관음동'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 도장동(都張洞)
        옛날부터 '도장동'이라 불러왔는데, 지금은 '도장동'(都張洞)이라 쓰지만 도압동(道壓洞), 도장동(道張洞)이라고도 쓰이지만, 이 말은 필경 불도(佛道)를 닦는다는 '도장'이 변하여 이루어진 지명이라 생각된다.
      • 절골
        이 마을에는 마을사람 모두 따르는 고승이 사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마을을 '절골'(寺谷)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무수리(無愁里)
      예전에 이 마을에는 광산(光山) 김씨가 집단으로 살고 있었는데 경치가 좋고 인심이 후한 곳으로 마을 주민들이 모두 '근심없이 모두 산다'고 하여 '무수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영동리(嶺東里)
      조선조 초기에 광주목사(廣州牧師)가 이곳을 지나다가 동쪽 큰 고개 밑에 자리잡은 마을이라고 했다 해서 '영동리'라 일컫게 되었다고 한다.
      • 거먹골
        이 마을 중앙에는 커다란 연못이 하나 있는데 그 속에는 큰 거북이 한 마리가 살고 있는데 마을예 무슨 흉사가 있을 때면 나타나서 예고를 해 주었다고 해서 '거북골'이라 불렀는데 나중에 이 말이 변하여 '거먹골'로 변했다는 것이다.
      • 구룡동(九龍洞)
        아주 먼 옛날에는 이 마을은 바다였다고 한다. 이 바다가 육지가 되면서 큰 연못이 하나 생겼는데 어느 여름에 비가 주야로 4일간 쏟아지더니 이 못 속에 있던 아홉 마리의 용이 하늘로 승천했다는 전설이 전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 마을을 '구룡동'이라 하게 되었다.
      • 석둔(石屯)
        옛날에 이 곳에서 전쟁이 있을 때 돌로 진을 쳐서 석진(石陣)을 만들었다고 해서 애초에는 '석진'(石陣)이라 했는데 이 말이 변하여 '석둔'(石屯)이 되었다고 하며, 또 일설에는 석씨 성을 가진 장군이 전쟁에서 전공을 세웠고 그의 후손들이 이곳에 집단으로 거주하게 되었다고 해서 '石屯'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 오리(梧里)
      이 마을 한가운데 커다란 오동(梧桐)나무가 한 그루 있어 그 나무의 상태를 보아 일 년의 길흉을 점쳤다고 하여 '오동나무골'이라 하다가 한자로 '梧里'라 하게 되었다. 그러나, 1973년 팔당댐이 생긴 이래 마을을 떠나는 사람이 많아졌다.
    • 정지리(亭支里)
      1923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에 '정자동'과 지위동(支渭洞)을 통합하여 '정지리'라 부르게 되었다.
      • 정자동(亭子洞)
        지금은 없지만 옛날에 이 마을에는 정자가 있었다고 하여 마을이름을 '정자동'이라하게 되었다.
      • 지위동(支渭洞)
        조선시대에 한양에 사는 고관대작댁 자제들이 이곳에서 한가롭게 낚시질하던 곳이 기산위수(奇山渭水)라 하여 애초에는 '기위동(奇渭洞)이라 하였으나 후에 '지위동'이라 부르게되었다.
    • 원당리(元堂里ㆍ원댕이)
      예전에 이 마을에는 날씨가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는 '원지'(元地)라는 연못이 있었다고 해서 '원댕이'라 하였다고 한다. 또한 일설에는 유명한 장수가 있었다고 해서 '으뜸되는 사람'이란 뜻으로 '원댕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 가생이골
        이 마을은 원댕이 맨 가장자리에 위치하고 있다고 해서 '가생이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6. 남종면의 유래
    조선시대 양근군楊根郡에 속하였는데 군의 남쪽 끝에 위치하므로 남종면이라 부른다고 하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광주군에 편입되었다.
    • 분원리(分院里)
      조선조 시대 궁중에서 쓰는 사기그릇을 관장하던 사옹원(司甕院)의 현지 제작소가 있던 곳으로서 분점이란 뜻에서 분원이라 불렸다. 영조시대에는 분루원이라고도 불렀다. 이곳에는 옹기 및 사기를 구워 파는 시장이 오랫동안 번창하였으나 을측년 대홍수 이후에는 쇠퇴하였으나 광주 분원하면 지금도 사기(司器)그릇을 연상하는 곳이다.
    • 검천리(檢川里)
      능곡ㆍ알미ㆍ종단의 세 자연부락을 합하여 원래는 '사천리'(四川里)라 하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개천을 측량한 이후에는 '검천리'라 부르게 되었다.
      • 검주(檢단舟)
        이곳은 수심이 낮아 여주, 원주 등지로 가던 뱃짐이 이곳에서는 다시 짐을 내려서 간다고 해서 '검주'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 능곡(陵谷)
        충청도에서 한양으로 풍산(豊山) 심씨 집안의 장례행렬이 지나가다가 갑자기 불어닥친 바람으로 명정(銘旌)이 날려 이곳에 꽂히므로 여기에 묘를 썼다고 한다. 이리하여 이곳 지명이 '능곡'이 되었다는 것이다.
      • 알미
        이 마을을 건너편에서 바라보면 마을의 형태가 새가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라고 해서 '알미'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 양지(陽地)말
        이 마을 주위의 경관이 아름답고 또 양지가 바른 곳에 위치한 마을이라고 해서 '양지말'이라 이름하게 되었다 한다.
      • 종여(終灘)울
        청탄에서부터 시작한 남한강의 거센 여울이 이곳에 와서 끝난다고 해서 '종여울'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 수청리(水靑里ㆍ푸프레여울)
      이 마을 앞으로 흐르는 강줄기가 하도 맑고 푸르러서 이름을 푸르레여울'이라 부르고 한자이다. 윗마을은 '청탄' 아래 부락은 '작은 청'이라 부른다.
      • 구항동(狗項洞ㆍ굽은목)
        이 마을 앞으로 흐르는 물줄기가 거센 여울을 이루면서 흙과 모래를 퇴적시키면서 물줄기가 굽어 꺾이는 곳이고 해서 '구항도'이라 하고 속칭으로는 '굽으로목'이라 부른다.
    • 귀여리(歸歟里)
      조선조 중종 때 정승 한 분이 이곳에 낙향하여 귀여정(歸歟亭)이란 정자를 짓고 소일하였다고 하여 이 마을을 '귀여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에 '귀여리'라 일컫게 되었다고 한다.
      • 귀실(貴室ㆍ구실)
        옛날 어느 정승 한 분이 이곳 경관이 하도 아름다워 발길을 멈추고 잠시 쉬어갔다고 해서 '귀실'이라고 하다가 지금은'구실'이라 부르게 되었다.
      • 수리울
        이 마을의 입구는 좁으나 그 안은 매우 넓은 마을인데 뱀바위, 부엉바위 등에는 독수리, 부엉이 같은 수리과 조류 등이 많이 살았다. 그리하여 마을이름도 '수리골'이라 하다가 지금은 '수리울이라 부르게 되었다.
      • 제청말
        옛날에 이 마을에는 마을사람들이 공동으로 이용하는 제청이 있었다고 하여 '제청말'이라 하게 되었는데 지금은 수몰(水沒)되었다.
    • 금사리(金沙里)
      예부터 이 마을 앞으로는 하천이 하나 있는데 이 하천에는 사금(砂金)이 났다고 한다. 따라서 이 마을을 '金沙里'라 부르게 되었다.
      • 구(舊)터
        조선조 시대 사옹원(司甕院)에서 필요한 사기그릇을 굽던 가마터가 있던 곳인데 이 가마가 분원으로 옮긴 후 이곳은 '가마터가 있던 옛터'란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 삼성리(三成里)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에 '삼정동'(三政洞), '과학동(過鶴洞), '족자동'(族子洞)을 합하여 '세 마을이 모여 이루어진 마을'이란 뜻으로 '삼성리'라 부르게 되었다.
      • 삼정(三政)골
        이곳은 경관이 아름다워 조선조 말기에 안(安), 노(盧), 권(權)씨성을 가진 세정승의 묘를 썼다고 해서 '삼정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과학동(過鶴洞)
        이곳의 경관이 매우 아름다워 학들이 무리를 지어 이곳에서 서식하였다고 하여 마을이름을 '과학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 족자동(簇子洞)
        조선시대 권교인이라 정승이 임금으로부터 족자를 하사받아 족자에 쓰인 데로 95칸짜리 큰 집에 살았다고 해서 '족자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이석리(二石里)
      이곳은 1914년 전국의 행정구역이 개편도던 이전 시기까지는 성림동(聖林洞)이라 부르다가 조선조 말기 고종의 자(字)가 성림(聖臨)이라 황공하여 석림(石林)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이웃의 석조정(石潮亭)을 합하여 '이석리'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7. 남한산성면의 유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남한산성이 위치하고 있어, 2015년 행정구역 명칭을 중부면에서 남한산성면으로 변경하였다.
    • 광지원리(光池院里)
      조선조 여주의 영릉에 왕래하던 임금이 쉬시는 역원(驛院)이 이곳에 있었는데 그 옆에 있는 연못에 햇볕이 비치면 연못이 빛을 발했다고 해서 이 마을을 '광지원리'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 굴바위
        이 마을 앞산에 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에는 큰 굴이 뚫려 있어 '굴바위골'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 상번천리(上樊川里)
      마을 중앙으로 번천(樊川)이라는 냇물이 흐르고 있는 양편으로는 산이 울타리처럼 싸고 있다고 해서 '상번천리'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 관청수(灌淸水)
        마을 앞으로 논에 대는 충분한 봇물이 흘렀는데 그 물이 유난히 맑아서 '관청수'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 내곡
        이 마을에는 아무리 날씨가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 냇물이 흐른다고 해서 '내곡'이라 부르게 되었다.
      • 벌래(樊內)
        마을 주위에 산이 울타리처럼 둘러쌌다고 해서 '벌내'라고 했는데 이 말이 변하여 '벌래'라 부르게 되었다.
      • 송현(松峴ㆍ솔치)
        조선조 말기에 붙여진 이름으로 뒷산에는 소나무가 유난히 많이 우거졌다고 해서 '솔치'라 부르게 되었으며 한자로는 '松峴'이라 쓴다.
    • 하번천리(下樊川里)
      마을 중앙으로 냇물이 흐르고 있으며 양편으로는 산이 울타리처럼 형성되었는데 그 아래쪽이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라서 '하번천리'라 부르게 되었다.
      • 박진(朴陣)이
        이 마을에는 예부터 박씨와 진씨가 많이 모여 사는 집성촌(集姓村)이라 하여 '박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 양지(陽地)말
        상번천리에서 하번천리로 향하여 내려가다가 왼편 양지바른 곳에 형성된 마을이라서 '양지말'이라 부르게 되었다.
    • 엄미리(奄尾里)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엄고개'와 '미라'(尾羅)을 합하여 '엄미리'(奄尾里)라 부르게 되었다 하며, 또한 일설에 의하면 한양에 살던 엄정승(嚴政承)이라는 이가 이곳에 명당이 많다는 소문을 듣고 고개 위에서 내려다보니까 이 고개의 형태가 '뱀의 꼬리'같다고 해서 '엄미리'라 하게 되었다고 한다.
      • 미라울
        밀양 박씨가 이곳에 묘를 쓰고 난 후부터는 '밀양골'이라 하였는데 이 말이 변하여 '미라울'이라 하게 되었다고 한다.
      • 벽수(碧水)골
        마을 뒷산에서부터 흘러내리는 냇물이 하도 맑고 푸르러서 이 마을을 '벽수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새말
        옛날에 이 마을을 지나던 원(員)님이 이곳을 지날 때 엄나무 가지에 새들이 쉬고 있는 모습이 하도 평화스러워 이 마을을 '새말(鳥村)'이라 했다고도 하고, 또 이 마을은 '새로 만들 마을'이라 해서 '새말'이라 하게 되었다고도 한다.
      • 안말
        마을의 위치가 엄미리 오른쪽 산기슭이라서 안쪽에 있다고 해서 '안말'이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 검복리(黔伏里)
      이 마을은 검단산(黔丹山)밑에 위치하고 있는데 그 밑에 마을이 엎드려 있는 모양이라서 '검복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남벽수(南碧水)
        검단산 줄기 남쪽 끝에 산이 병풍처럼 둘러친 계곡이 있는데 그 계곡의 물이 어찌나 맑던지 '남벽수'라 부르고 있다.
      • 양지(陽地)말
        검단산 밑에 양지 바른 곳에 마을이 위치하고 있다고 해서 '양지말'이라 부르게 되었다.
    • 불당리(佛堂里)
      조선조 선조시대에 이곳에 불당(佛堂)을 지어놓고 근방 마을사람들이 부처님을 믿었다고 해서 처음에는 '불당골'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불당리'라 부르게 되었다.
    • 오전리(梧田里)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오야소'와 둔전촌을 합하여 오전리라 부르게 되었다.
      • 오야소(梧野所)
        현재의 오전리에는 5개의 자연부락이 있는데 그 가운데 오동나무가 많은 곳에 위치한 마을이라고 해서 '오야소'라 부르게 되었다.
      • 둔전(屯田)말
        이곳에는 고려시대부터 군인들이 주둔하면서 군량미를 자급자족하기 위하여 농사를 짓던 둔전이 있었다고 해서 '둔전말'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좁은목
        이 마을의 형태가 좁은 골짜기의 목(頊)처럼 생겼다고 해서 '좁은목'이라 부르게 되었다.
    • 산성리(山城里)
      이곳에 있는 성은 조선조 인조 때 두 차례나 증축한 일이 있는데 이 마을은 이 성이 있는 높은 곳에 위치한 마을이라 해서 '산성리'라 부르게 되었다.
  8. 경안동의 유래
    행정동이자 법정동의 하나이다.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이 남하아여 나라를 세운 회안국淮安國을 이곳 경안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문헌상 근거가 확실하지 않다. 그전에 경안동에 ‘회안교淮安橋’라는 다리가 있었다고 한다. 원래 ‘경안慶安’이었으나 일제의 1910년대 이후 ‘경안京安’으로 바뀐 것으로 보고 있으며, 유래는 미상이다.
    • 경안리 (京安里) ⇒ 현 경안동
      1910년 8월29일 면제(面制)를 실시할 때 경안리(慶安里)였으나, 1932년 7월 5일 경안면은 광주면으로 부르게 되었을 때 慶安里를 京安里로 개칭하게 되었다.
      • 가골
        조선조시대 현재의 경안리 5리 안골에 먼저 사람이 살게 되었는데 그 바깥쪽인 가장자리에 생긴 마을이라고 해서 마을이름을 '가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관말(官村)
        일제시대에 관청에 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산다고 하여 이 마을을 '관마을'이라고 하였는데 요즘은 줄여서 '관말'이라고 한다.
      • 파발막(把撥幕)
        조선조 시대에 한양에서 여주ㆍ이천방면으로 가고, 또 지방에서 한양으로 가는 파발마들이 말을 갈아타는 파발막이 이곳에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마을이름이다.
    • 쌍령리(雙嶺里) ⇒ 현 쌍령동
      이 마을의 위치가 초월읍과 경계에 있는 큰 고개(大嶺)와 초월읍에 있는 작은 고개(小嶺)가 있는 근처에 형성된 마을이라고 해서 '쌍령리'라고 한다.
      • 최촌(崔村)말
        조선시대부터 이곳에 수원(水原) 최씨들이 집단을 이루어 살았다고 해서 이곳을 '최촌말'이라 부르게 되었다.
      • 김촌(金村)말
        조선조 시대부터 안동(安東) 김씨가 집단을 이루어 이곳에 살게 되어 이곳을 '김촌말'이라 하게 되었는데, 현재도 그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다.
      • 주막(酒幕)거리
        원래 이 곳에는 임진왜란 때 까지는 관에서 운영하던 쌍령원(雙嶺院)이 있던 곳이었으나 그 후에 술도 팔고 숙박도 할 수 있는 주막이 여럿 생겨나서 이 곳을 '주막거리' 또는 '파주말'이라고도 부르게 되었다.
  9. 송정동의 유래
    행정동이자 법정동의 하나이다. 조선시대에 소나무가 무성하고 왕족 소유의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관내 밀목마을에 송현松峴 : 솔치이라는 고개도 있다.
    • 송정리(松亭里) ⇒ 현 송정동
      지금 시청이 자리잡고 있는 뒷 편으로 송림이 우거지고 왕손들 소유의 정자(亭子)가 여럿 있었다고 해서 1910년 행정 구역이 개편될 때 이곳을 '송정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수하리(水下里)
        경안리를 지나 흐르는 경안천과 탄벌리를 지나 흐르는 탄벌천의 어귀에 위치한 마을이라고 해서 '물아래(水下) 마을(里)'이라 '수하리'라고 하였다.
      • 밀목리(密木里)
        이 마을 근방에 '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졌다'고 해서 '밀목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통미
        이 마을사람들은 예로부터 개수물통, 물통, 오줌통 같은 '통을 메워 팔아다가' 생계를 이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마을이름을 '통미'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회덕리(回德里) ⇒ 현 회덕동
      제청(祭廳)마을에 살던 사람들이 딴 곳으로 살러 갔다가 고생만 하고는 다시 이 마을로 돌아와서 마음잡고 살다보니 생활이 점점 윤택해져서 잘 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돌아와(回)덕 (德)을 입고 사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회덕리라고 하였다고 한다.
      • 제청말(祭廳)
        옛날에 이 마을 어느 집에 제사를 지내는 제청이 있었는데 제사를 다 지내고 탈상을 하여 제청(일명 상청)을 치우려고 하니 제청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에 이 마을을 '제청말'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두새오개
        제청말에서 모개미(木峴里)로 넘어가는 고개와 오전리(梧田里)로 넘어가는 두 고개의 모양이 마치 두 마리 새가 날개를 편 듯하다고 해서 '두(二) 새(鳥) 고개(峴)'란 뜻의 '두새고개'라고 하였는데 1모음 아래서 ㄱ이 탈락되어 '두새오개'가 되었다.
    • 탄벌리(炭筏里) ⇒ 현 탄벌동
      한양에서 쓰는 숯(炭)을 굽는 마을에 탄동(炭洞)이라는 마을과 넓은 들을 끼고 있는 벌원(筏院)이라는 마을을 합쳐서 '탄벌리'라 부르게 되었다.
      • 숯가마골
        한양에서 양반님네들이 쓰는 연료인 숯을 굽는 가마가 있는 곳이라고 하여 이곳을 예부터 '숯가마골'이라 불렀다.
      • 벌원(筏院)
        산 밑으로 탄천(炭川)을 끼고 발당한 넓은 들판가에 자리잡은 마을이란 뜻으로 '벌원리'라 부르게 되었다.
      • 사기막(沙器幕)골
        조선조부터 이곳에서 사기그릇을 굽는 가마가 있던 곳으로 이곳 마을이름도 '사기막골'이라 일컫게 되었다.
    • 목현리(木峴里) ⇒ 현 목현동
      조선조부터 이곳에는 감(柑)나무가 많아서 '감골'이라 부르던 곳인데, 1910년 리로 고치면서 '나무가 많고 고개가 많다'고 해서 이곳을 '목현리'라고 일컫게 되었다고 한다.
      • 모개미
        원래 이름은 '목감리'(木柑里)였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 모개미는 목(木)+감(柑)+里가 변하여 '목감리'에서 모감리>모감이>모가미가 된 것이다.
      • 새오개
        제청말에서 용생골로 가는 고개와 목현리로 가는 고개의 형태가 마치 새(鳥) 모양과 같다고 해서 새(鳥)+고개(峴)가 합쳐서 '새오개'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용생골
        이곳에 있는 샘(泉)에서 옛날에 용이 나와 하늘로 승천한 일이 있다고 해서 용(龍)+샘(泉)+골(谷)>'용샘골'이라 했는데 이 말이 변하여 '용생골'이라 흔히 부르게 되었다.
  10. 광남동의 유래
    행정동으로, 광주군이 시로 승격될 때 만들어졌다. 그전 광주면의 남쪽에 위치한 마을이므로 광남동이라 명명하였다.
    • 삼리(三里) ⇒ 현 삼동
      행내지곡(內地谷), 외지곡(外地谷), 소곡(小谷) 세 자연부락이 모여 형성된 마을이라고 해서 이 마을을 '三里'라고 부르게 되었다.
      • 내지곡(內地谷)
        골짜기 안쪽에 형성된 마을이라고 하여 이곳을 '안골' 또는 '내지곡'이라 부르게 되었다.
      • 외지곡(外地谷)
        내지곡 마을이 생긴 이후 나중에 그 바깥쪽으로 형성된 마을이라고 해서 이를 '외지곡'이라 부르게 되었다.
      • 요곡ㆍ작은골
        조선조 인조 때 예조판서를 지낸 경주 김씨란 분이 나라에 공을 세운 대가로 남한산성에 딸린 땅을 포함한 골짜기 일부를 받았다고 하는데, '작은골'이라 하여 '요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 중대리(中垈里) ⇒ 현 중대동
      이곳에는 고려 중기부터 광주 안씨가 집단부락을 이루어 살던 '텃골'(垈里)과 중말(中洞)이라는 두 마을로 통합하여 '중대리'라 부르게 되었다.
      • 중말
        중대리' 가운데에 위치하였다 하여 '중말' '가운뎃말'이라 부르고 있다.
      • 텃골
        옛날부터 집짓기에 알맞은 마을이라고 해서 '텃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 직리(直里ㆍ곧은골) ⇒ 현 직동
      태봉산(胎峰山)에서 내려오는 곧게 뻗은 골짜기에 형성된 마을이라고 해서 '곧은골'이라 하였는데 이를 한자로 '直洞ㆍ直里'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 새터
        '곧은골'(直里)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이후 사람이 늘어나자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 '새터'라 부르게 되었다.
    • 태전리(胎田里) ⇒ 현 태전동
      조선조 9대 임금인 성조의 태(胎) 묻었다는 태봉산(胎峰山) 기슭에 형성된 마을인데, 이곳에는 또한 화전(火田)이 많다고 해서 태봉(胎峰)이라 부르게 되었고 또 그 기슭에 발달한 부락을 '胎峰'이라 일컫게 되었다.
      • 태봉(胎峰)
        조선조 9대 성종의 태(胎)을 묻은 산이라 하여 이 산을 태봉산(胎峰山)이라 부르게 되었고 또 그 기슭에 발달한 부락을 '胎峰'이라 일컫게 되었다.
      • 태외(胎外)ㆍ태바께
        태봉마을 바깥쪽에 형성된 마을이라고 해서 한자로는 '태외(胎外)' 고유어로는 '태바께'라 부르게 된 마을이다.
      • 옥동(獄洞)ㆍ옥텃골
        조선조시대 죄수들을 가두어 두은 옥사(獄舍)가 이곳에 있었다고 하여 '옥동' 또는 '옥터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 띠야골
        이곳에는 어린 순을 '뻘기'라고 하여 먹기도 하는 띄(茅)가 많이 있다고 해서 이 마을이름 을 '띠야골'. '띠임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 장지리(牆枝里) ⇒ 현 장지동
      1910년부터 담아, 앞가지, 뒷가지 세 마을을 합하여 장지리라 부르게 되었으니, 장내(牆內;담안)와 앞가지ㆍ뒷가지에서 한자씩을 따서 만든 이름이다.
      • 담안(牆內)
        주위에 있는 산이 마치 울타리처럼 둘려있다고 해서 '담안'(牆內)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앞가지
        장지리 1리에서 2리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 두 가지가 뻗쳐있는 큰 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그 두 가지 가운데 앞가지가 뻗쳐있는 방향의 마을이라고 해서 '앞가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 뒷가지
        위에 있는 나뭇가지 가운데 뒷가지가 뻗쳐있는 쪽의 마을이라고 해서 '뒷가지'라 부르게 되었다.
      • 절골
        지금은 없어졌지만 고려시대에 장지리 3리에 절이 있어서 이곳을 '절골'이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 목리(木里) ⇒ 현 목동ㆍ나뭇골
      오포읍에서 1973년 행정구역 개편 때 광주면으로 편입된 마을로 주위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나무가 우거졌다고 해서 '나뭇골'이라 부르다가 한자로 '木里'라 부르게 되었다.

출전 : 광주문화원 (http://www.gjmh.or.kr), 『광주의 지명유래』, 2005 ; 광주시, 「광주시 행정지도」,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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