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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른 쪽빛이 배어있는 광주

해공 신익희

해공 작품으로 본 해공 사상과 대중화 - 시조 ‘통곡’ 중심의 분석과 연구

시조 ‘痛哭’ 해공 친필 휘호

시조 해공 친필 휘호 이미지

痛哭

  • 痛哭長安夜
    忽然大笑夜
    傍人那得識
    樽酒有無時

    ( 1922.11월 )
해공신익희선생의 삶 5구분
  • 유소년기(1894 ~ 1905) : 경기도 광주시 서하리 출생후 백형으로부터 한문학을 배운 시기
  • 청년기(1908 ~ 1918) : 한성관립 외국어학교,와세대학 유학으로 신문학을 배우며 독립운동의 뜻을 세운 시기
  • 독립운동기(1919 ~ 1945) : 상해 망명과 임시정부 내무총장서리,외무총장서리 요직과 독립운동 실천 시기
  • 교육계몽기(1946 ~ 1947) : 국민 교육계몽운동, 대학설립
  • 민주화운동기(1946 ~ 1956) : 환국 후 국회의장, 대통령 후보등 민주화
작품에 나타난 해공사상 3가지
  1. 압운(押韻 rhyme)미학은 감정의 절제와 삶의 미학이다.
    • 痛哭
    • 痛哭長安夜
      忽然大笑夜
      傍人那得識
      樽酒有無時
  2. 역설적표현은 큰 뜻의 선구자적 삶의 미학이다.
    • I find no peace, and all my war is done;
    • I fear and hope, I burn, and freeze like ice;
    • I fly aloft, yet can I not arise;
    • I feed me in sorrow, and laugh in all my pain.
  3. 지행합일사상의 실천가다.
    • 양명학의 지행합일사상을 갖고 있었고 그대로 실천
    • 지행합일은 한마디로 인식과 실천을 일치시키는 삶이다.
    • ※ 양명학(陽明學)
      -중국 왕수인의 지행합일론은 지와 행 양자의 근원적 통일성을 말하는 것.모든 만물에 존재하는 탐구와 마음에 존재하는 이의 실천이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지와 행은 마음에 존재하는 양지의 발현이라는 형태로 처음부터 결합되어 있다.
해공신익희 - 미니다큐
해공 신익희 다큐영상 나레이션 원고
이창봉

대한민국의 독립와 민주화의 은인 해공 신익희
대한민국 독립과 민주주의 근원에서 해공 신익희를 만나다
갑오경장과 동학농민혁명가 있었던 근대화 개혁의 원년이었던 1894년 광주에서 해공 신익희 선생이 출생했다
보통학교를 그만둔 해공 신익희선생은 1910년에 관립 한성외국어학교 영어과에 입학한다
국권을 강탈 당하고 형식적인 국명을 가진 나라로 전락한 대한민국은 1910년 한일 합병조약으로 국권을 빼앗기게 됐다.
그리고 1912년 일본 와세다대학교 정경학부에 입학해서 나라를 찾기 위한 노력을 시작한다.
학우회를 조직해서 학지광 잡지를 발간해서 민족정기를 고양했다
그러던중 3.1운동을 지휘하다가 일경의 체포령을 피해서 상해로 망명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임시정부를 8번 옮겨 다니며 고난과 희생을 감내하며 독립운동 27년간의 독립운동의 처절한 싸움을 이어간다
해공은 1929년 한국혁명당과 1935년 민족혁명당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그리고 1937년에는 조선민족투쟁동맹을 창건해 중국 각지에서 목숨을 걸고 항일 독립운동을 지휘했다.
1944년에는 임정 내무부장으로 취임했다.
감격스런 해방으로 고국으로 돌아온 해공은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펼쳤고 1946년에는 국민대학교를 창립했다.
바로 독립운동에 이어서 교육주의로 이어진 것이다.
1947년에는 입법위원 의장으로 피선되어 헌법과 건국에 필요한 법률 제정을 주도했다.
자유,민주,정의로운 나라 대한민국 건국 이념의 초석을 놓은 것이다.
그 후 1948년에는 경기 광주 국회의원으로 무투표 당선됐고,국회의장에 피선되어 4회 역임하며 의정에 이바지하게 된다
독립과 건국에 앞장선 해공 신익희 민주주의를 외치다.

나라와 국민을 위한 큰 걸음,대통령 후보에 오른다.
국민이 주인인 나라 대한민국은 해공 신익희 선생의 바램이었다.
1956년5월3일 한강 백사장 사자후 선거유세에는 당시 50만 인파가 운집해 해공선생을 지지했다.
이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 연설은 해공 신익희선생의 마지막 연설이 되고 말았다.
1956년 5월5일 지방유세차 탄 호남선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서거한 것이다.
해공을 잃은 온 국민의 슬픔은 슬픔으로 끝나지 않았는데,해공 신익희 선생의 장례식은 국민장으로 국민의 슬픔 속에 거행됐다.
음수사원,굴정지인 물을 마실 때 근원을 생각하여 이 우물을 누가 팠는지 그 고마움을 잊지 말고 물을 마시듯이 우리나라 근대 현대화의 근본에는 독립,민주주의을 위해 희생한 해공 신익희 선생의 뜻을 가슴에서 놓치지 말아야겠다. (끝)
페이지 담당자
  • 문화예술과 | 송란 | 031-760-2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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