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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도자기 유래와 역사

분원역사고증

도자기 사진 1

고증 : 김영원(국립공주박물관장)

경기도 광주는 조선시대 왕실자기를 제작한 분원관요(分院官窯)가 운영되었던 곳이다.

분원이란 조선시대 궁중내에서 왕에게 소용되는 모든 진상품 및 식사를 담당하는 중앙관청인 사옹원(司饔院)의
하급기관을 뜻한다.

최적의 입지

조선 초부터 왕실에서는 분청사기와 백자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세종 초부터 왕은 백자만을 사용하였다는 “용재총화”의 기록과 같이 왕실에서는 백자사용이 증가하였다. 이러한 추세에 따라 세조 말 예종 초 즉 1467~68년경 사옹원의 분원이 경기도 광주에 설치된 것이다.

경기도 광주에 분원이 설치된 배경에는 기본적으로 좋은 태토인 광주토(廣州土)와 풍부한 땔감을 갖추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분원이 운영되면서 왕실용 최상품 백자에는 여러 지방에서 운반된 질 좋은 백토가 사용되었다. 세종 때 경상도 고령과 상주에서도 최고급 백자를 만들었으나 광주는 수도 한양에 가까워 한강을 통해 왕실로 백자를 수월하게 운반할 수 있는 지리적인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다시 말해 광주는 조선왕실자기 산지로서 최적의 입지를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에 밀집되어 있던 가마에서 중앙에 자기를 납품하기 어렵게 되었고, 최상품 백자의 제작은 광주분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광주백자의 명성은 광주분원이 들어서기 전인 세종 때부터 이미 널리 알려졌다. 당시 중국 명나라의 황제나 사신이 조선의 세련된 백자를 구하려 했고 그럴 때마다 광주가마에서 백자를 정교하게 구워 바쳤던 것이다.

분원의 효과

한국 도자사에서 광주에 분원이 설치되면서 일어난 커다란 변화는 종전에 유행했던 분청사기가 사용량이 줄어들면서 급격히 쇠퇴한 점이다. 또한 전국에 분포되어 있던 자기소 139개소와 도기소 185개소 가운데 특별히 사옹원 관리가 파견된 가마에서 왕실용 자기를 구워 운반해오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그러나 분원이 운영되면서 자연히 광주가마에서 왕실백자의 공납을 맡아 사옹원의 업무가 한층 효율적으로 시행되었다. 경기도 광주의 백자 요지는 한강 경안천을 사이에 두고 그 좌우에 분포되었다. 그 가운데 문헌에 등장하는 지명은 오양동(현재의 오향리), 벌은천리(현재의 번천리), 탑리동(현재의 탑선동)등이다.

조선 초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번천리나 우산리, 도마리 등지의 가마에서 백자를 구웠는데 대부분이 순백자이며 청화백자와 청자는 소량에 불과하다. 청화백자가 다량 제작되기는 18세기 이후이다. 15세기 전반기의 가마에서는 중국풍의 문양과 송죽문이나 간결한 절지문 및 달과 별 등이 회화적인 수법으로 표현된 청화 백자편이 출토되었다. 15세기 후반으로 가면서는 중국식 문양보다는 한국화된 매화와 새의 문양이 한가롭게 시문된 청화백자가 제작되었다.

특히 왕실용 의기라고 생각되는 것은 홍치(弘治)라는 중국연호가 쓰여진 청화백자 항아리인데, 전면에 소나무와 대나무가 한 폭의 그림과 같이 그려졌다. 힘차고 당당한 조형을 지닌 이 항아리는 홍치2년 즉 1489년이라는 제작연대를 가지고 있는 명품이다. 1592년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전국토가 초토화되어 가마도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런 가운데에도 광주일대의 상림리, 선동리, 송정리 등지에서 세련된 백자를 제작하는데 주력하였다.

청화백자

전국적으로 가마가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청화백자를 다시 제작하기 시작한 시기는 17세기 중엽부터다. 제(祭)라고 쓰인 청화백자가 제작되었고, 청화 안료가 부족하여 청화백자난초문각병과 같이 문양이 간결하고 흐릿한 예가 대부분이다. 또한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던 청사안료로 그려진 청화백자가 유명했다. 청화백자는 생활자기로서 임진난 이후부터 조선말까지 일반 서민들을 중심으로 애용되었다. 이 시기의 특징적 조형은 배가 불룩하고 비대칭으로 다소 일그러진 대형 항아리로 이런 항아리는 조선중기 백자의 대표적인 조형으로 꼽히고 있다.

우리나라 도자기에서는 붉은색으로 장식된 예가 매우 드물다. 그러나 18세기 경에는 붉은색 문양의 진사백자가 관요 주변 가마에서 제작되었다. 송정리 가마 이후 유사리, 신대리, 탑리동, 오향리, 금사리 등지에서 가마가 운영되었다. 이 가운데 금사리는 전형적인 조선중기 백자로 꼽히는 눈같이 흰 설백자를 제작했던 가마였다. 금사리 가마는 영조28년(1752) 남종면 분원리로 분원관요가 이동하기까지 운영되었다. 18세기 후반부터는 연적, 필통 등의 각종 문방구류와 제기들이 만들어졌고 민화의 유향과 더불어 도자기에도 까치와 호랑이 같은 문양이 그려졌다.

19세기에는 청화백자에 진사체를 가하여 흰 바탕에 푸르고 붉은색이 어우러지는 비교적 화려한 백자청화 진사체가 유행하였다. 굽 높은 제기 내면 중앙에 「祭」, 「壽」, 「福」 등이 도안화된 문자, 특이한 구도의 산수어문, 봉황문, 십장생문, 모란문 등이 18세기에 이어 유행하였다. 「비변사등록」 122권과 「여지도서」 상권 양근군 물산에 의하면, 영조 27년 분원 이설에 관한 논의가 있고, 그 이듬해인 1752년 남종면으로 이설했다고 쓰여 있다. 요컨데 분원관요는 영조28년 금사리에서 광주군 남종면 분원리로 옮겨 조선후기를 장식한 분원백자를 제작했다.

분원의 민영화

이 시기에 분원은 사옹원 관리의 감독을 받기보다 영리를 목적으로한 상인의 개입으로 왕실용 자기의 번조에 차질을 빚게 되었다. 결국 1884년부터 분원리 관요체제를 벗어나 민영화됨으로써 상인의 영리추구를 위한 자기 생산에 주력하게 되었다. 이 같은 분원관요 체제의 붕괴로 인해 18세기 중엽 이후 분원백자의 질이 급속히 저하되었다. 현재까지 발굴조사된 가마 가운데 분원관요였다고 생각되는 것은 우산리9호, 번천리9호, 선동리2호 등지 가마이다. 기타 관요 주변에서 조선백자를 생산하던 가마로는 번천리5호, 선동리3호 등이 있다. 그러나 이들 관요에서도 관청용과 서민용 백자를 함께 구웠던 흔적이 발굴을 통해 밝혀졌다.

순백의 아름다움을 바탕으로 한 백자는 순백에 대한 조선인의 미감을 철저히 반영한 도자기였다. 왕실에서부터 지방민들에 이르기까지 품질의 차이는 있겠으나 생활필수품으로 자리 잡은 조선백자는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대접, 접시, 항아리, 병 등 생활도자기에까지 기본적인 형태가 그대로 계승되었다.

1467~68년경 경기도 광주에 분원을 설치하여 조선은 관요시대에 들어선다. 이 때 이미 백자는 전국적으로 대량생산되었다. 이상과 같이 경기도 광주는 분원이 설치된 이래 민영화되기까지 왕실진상용 백자의 제작을 전담했던 우리나라 유일의 관요였다. 분원관용 백자는 조선시대에 이념을 담은 절제된 아름다움과 세련됨을 지니고 있다. 세종 때 벌써 그 세련된 품질에 대한 명성이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졌다. 이렇듯 조선왕실자기의 전통을 확립했던 경기도 광주가 그 전통을 초석으로 하여 명실공히 자기의 중심지로 그 명성을 떨칠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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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역사

도자기 사진 2

광주의 도자역사

광주분원(廣州分院) 광주는 조선시대 사옹원의 분원이 설치되어 운영되던 유서 깊은 도자기의 고장이다.

분원이란 말은 왕실의 어기와 관청에 공납하던 도자기를 생산하는 곳으로 중앙 관리부처인 사옹원의 “분사옹원”을
약칭하지만 기록에는 “분원”이란 이름을 많이 썼으며 분주원이라 개칭되기도 하였다.

분원역사

사옹원에서 어기제조 및 공납을 맡은 것은 고려시대부터 였으며 조선 태조1년(1392)에 사선서를 설치했다가 사옹방으로 그리고 세조13년(1467) 사옹원으로 개칭하여 조선 말기까지 존속하였다. (여지도서)양근군조에 의하면 광주 번조소를 남종면으로 이전 설치한 것은 영조 28년(1752)이었다고 하며 매년 봄 가을에 사옹원 관원이 이용자기의 제조를 감독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분원의 역사는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분원전기

1392년부터 임진왜란까지의 시기로 전반기의 가마에서는 중국풍의 문양과 송죽매문이나 간결한 바탕문양 및 달과 별들이 회화적인 수법으로 표현된 청화백자들이 만들어졌다. 15세기 후반으로 가면서 중국의 문양보다는 한국화된 매화나 새의 문양이 시문된 청화백자가 제작되기 시작하였다. 분원 관요가 설치된 후 우수한 청화백자가 생산되었던 시기이다.

분원중기

1650년부터 1751년에 이르는 약 100년간으로서 임진왜란으로 인한 폐해가 극심하였고 제조기술도 조악해저 굽에 굵는 모래 받침이 붙어있는 것도 많다. 대표적 가마터로는 탄벌리, 선동리, 상림리, 송정리, 신대리 등이 있다. 17세기에 접어들어서는 중국의 명, 청이 교체되었고 대내적으로는 임진왜란 등 국내외의 상황이 격변하였기 때문에 양질의 백자를 생산하기 어려웠다. “청화안료를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청화백자 항아리가 없어 부득이 가화로 대신했다.”는 기록이 당시의 상황을 잘 말해주고 있다.

분원후기

왕실용 가마를 남종면 분원리로 옮긴 1752년부터 1884년 분원이 민영화 될 때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기형은 다양해지면서 화분, 호리병, 각병, 편형, 원호 들이 만들어졌고 연적, 필통 등이 문방구류의 제작이 활발해졌다. 분원후기로 가면서 다시 청화백자가 주종을 이루게 되었으며 “福”과 같은 글자를 쓴 것과 난초, 매화, 산수도 등의 문양이 많이 등장하지만 굵어지고 거칠며 청화발색도 진한 것이 대부분이다. 십장생, 연화문, 물고기문, 구름문 등 당시 유행했던 민화와 십장생이 도자기에 시문되어 후기 백자만의 특징을 보여준다.

시대별 분원

이와 같은 경향은 “영조실록”에 “중기에는 철화백자가 유행했으나 지금은 회청으로 그린다하니 매우 사치스러운 풍조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분원에서의 자기생산은 분기별 특징을 갖고 전승되었으나 17세기 후반부터 장인들의 생계를 보조하는 의미에서 개인적인 생산이 조금씩 허용되기 시작하고 18세기 들어오면서 상인 자본이 개입하면서 조금씩 변질되기 시작하다가 고종21년(1884) 민영화되었다.

지금도 광주분원 가마터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고급의 백자 파편들이 발굴되고 있으며 등록된 가마터 만도 185개 이상 되지만 현재까지 발굴된 것은 도마리, 번천리, 우산리, 선동리 등 4개의 가마에 불과하다. 이화여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유물에는 자기 제작 시기를 기록한 묘지편 뿐 아니라 백자 그릇바닥에 10년간의 간지명이 새겨진 파편 등이 있어 분원자기의 대를 상세하게 파악할 수 있다. 15세기 조선초기의 도마리 가마에서는 중국과 한국적 양식이 혼합된 과도기적인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특히 퇴촌면 우산리 가마터에서는 양질의 백자파편이 다량 출토되었으며 청화백자나 청자는 소량 출토되었다.

16세기 중반의 것으로 밝혀진 번천리 5호 가마의 출토품은 거의 순백자이며 청화백자편 3점과 철화백자편 1점 등이 발견되었다. 번천리 9호 출토품도 대부분 경질백자편으로서 매우 정교한 파편들이 발굴되어 당시의 뛰어난 자기제작 기술수준을 가늠하게 한다.

17세기 전반기의 것으로 유일하게 발굴 조사된 선동리 가마는 자연 구릉을 그대로 이용하여 만든 반지하식 가마이다. 이 가마에서는 17세기에 들어서 철화백자의 제작이 늘어났음을 알려주는 철화 백자편과 백자의 색이 회색으로 변한 조질백자편이 다량 출토되었다. 크리스티 경매에서 840만불(미화)로 낙찰된 철화백자 용문항아리와 같은 철화용문 파편들도 선동리 9호분에서 발굴되었으며 죽문, 포도문항아리 등의 국보급 철화백자 작품도 대부분 이 시기에 제작되었다.

18세기 이후 분원 후기의 가마터는 현재 발굴된 것이 없으며 현재의 남종면 분원리에 최후의 관요가 설치 운영되었는데 사옹원의 도제조와 번조관들의 공덕비가 그 곳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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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업지원과 | 임현우 | 031-760-2913
최종 수정일
2020-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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